[레바논 감정] 지푸라기 인간 (정영헌 감독,2013)

2014. 2. 28. 18:46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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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3년) 전주국제영화에서 상영된 후 호평을 받고 곧바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참가하여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 있다. 정영헌 감독의 ‘레바논 감정’이란 독립영화이다. 충무로에서 조감독으로 현장실력을 다지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나온 정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영화제목 ‘레바논 감정’은 시인 최정례가 2005년에 발표한 시의 제목이다. 정 감독은 그 시를 읽고는 강한 영감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의 데뷔작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영화 내용에 어울리는 멋진 제목이긴 하다.

남자, 여자와 만나다

어머니 기일을 맞아 헌우(최성호)는 납골당을 찾는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헌우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여전히 애통해한다. 비틀거리듯 초점 잃은 눈빛의 헌우는 선배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시골마을의 외떨어진 아파트. 뒷산에는 무슨 건물인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잿빛 동네이다. 선배는 떠나기에 앞서 “너 괜찮아? 내 집에서 송장 치르긴 싫어.”라는 말을 남긴다.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날 헌우는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다 헛것을 보게 된다. 눈 덮인 들판에서 누군가(아마도 엄마) 자기를 지켜보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줄로 당기고 있다. 그리고 뒷산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여자의 비명소리. 그 여자는 막 교도소를 출소하였다. 정처없이 도로에 오른 여자는 낯선 남자가 모는 차를 얻어탄다. 그리고는 그 남자의 돈을 훔쳐 눈 덮인 산으로 도망치고, 그 산에 놓인 노루 덫에 발이 걸린 것이다. 죽으려는 남자, 달아나려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뒤쫓는 잔인한 남자까지. 영화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게 흘러간다.

강원도 산골, 그리고 레바논 감정

영화를 보고 나면 다시 한 번 최정례의 시를 찾아보게 된다. 최정례의 시는 이렇다.

 

레바논 감정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고 할까봐요 

(중략)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시를 읽고 나면 딱히 드는 생각은 없다. 아마도 시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흘러갈 뿐이며 굳이, 딱히 매달려도 어찌할 수 없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런 어찌할 수 없는 세상만사를 굳이 개념을 짓자면 ‘X같은 세상’이 될 수도 있고, ‘미스터리한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걸 그냥 ‘레바논 감정’이라고 부르기도 작정했단다. 레바논이 정확히 어디에 붙었는지, 그 레바논에서 최근 무슨 큰 사건이 터졌는지 알 수 없듯이 레바논이란 것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굳이 의미를 두자면 그렇게 두면 될 일이다.

영화 ‘레바논 감정’은 출연 인물들의 과거가 미스터리하게 내던져진다. 직업도, 과거도, 지금의 상황도 애매모호하다. 헌우는 죽으려고 하지만 왜 죽으려고 하는지 설명이 없고, 여자는 포주(가죽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모른다. 포주는 왜 굳이 설산을 넘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지 뾰족한 설명이 없다. 그러고는 “내게 왜 그랬어?”라고 말할 뿐이다. 그게 중요한 질문이 아님을, 답을 기어이 얻으려고 하지 않음을 관객은 눈치 챈다. 그냥 “음.. 저게 레바논 감정인 모양이군”하면 된다.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영화는 영리하게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미스터리한 상황을 떡밥으로 깔고, 기기묘묘한 인물들의 비정형화된 연기를 통해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결말은 어느 정도 예상된다. 모두 죽든지 아님 뜻밖의 반전이 주어지든.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목도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악몽 같은 밤의 인간사냥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동트는 여명을 맞았을 때처럼 객석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레바논 감정’은 스릴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결론은 토속적이다. 분명 살 사람은 살아남고 죽을 사람은 죽으니 말이다. (박재환, 201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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