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금요일(2001/5/25) 미국 극장가에는 일제히 헐리우드 대작영화 <진주만>이 나붙는다.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는 어제, 500만 달러를 쏟아가며 하와이에 정박한 미 해군 항공모함 John C.Stennis호에서 진주만 생존자들을 포함한 2,000 명 이상의 게스트를 불러 모은 대규모 시사회를 가졌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어제 한국에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자 시사회를 가졌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1억 3천 500만 달러가 투입되어 단일 스튜디오 제작비 규모로서는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로 소문이 났고, 106일 촬영이 끝난 후 무려 10개월의 후반작업에서 헐리우드 영화사상 최대 규모의 특수효과가 추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영화는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엄청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을 먼저 확인해보려는 듯 어제 시사회장은 인파로 붐볐다. 177분의 영화는 과연 외형상으로 <타이타닉>을 능가하며, 전쟁영화가 보여주는 리얼함에 있어서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맞먹으며, 영화의 드라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큼이나 장대하다.
◇ 로맨스, 삼각관계, 그리고 진주만
영화는 두 미국 전투기 조종사와 그들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운명의 히로인이 펼치는 로맨스를 기반으로 하여 진주만 폭격의 비극과 그에 이어지는 미군의 동경 공략이 장대한 서사구조를 이룬다. 어린시절 테네시 주에서 자란 레이프(벤 에플렉)와 대니(조쉬 하트넷)는 죽마고우이다. 둘은 어릴 적 꿈처럼 함께 전투기 파일럿이 된다. 전 세계가 전쟁의 포연에 휘말려 들어갈때 유독 불안정한 자유를 구가하던 미국도 차츰 전쟁의 가시권에 접어든다. 레이프는 해군 간호사 에블린(케이트 베킨세일)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레이프는 에벌린과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전에 독일과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 전투비행대로 전속간다. 레이프가 영국으로 떠나간 후 대니와 에블린은 하와이의 진주만 기지에 배치된다. 거듭되는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놀라운 전승을 올리던 레이프도 어느날 격추당해 바다로 추락하고 만다. 하와이의 에블린과 대니에게 레이프가 죽었다는 통지서가 날라오고 두 사람은 슬픔과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사랑하는 연인과 형제와도 같은 친구의 죽음은 에블린과 대니가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고 만다. 운명의 1941년 12월 7일, 300여 대의 일본 전투기들이 진주만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린다.
◇ 역사냐 드라마냐
영화가 개봉되기 얼마 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인권단체가 "<진주만>으로 인해 미국내에서 아시아인들이 왜곡된 시각을 받게될 우려가 있다"면서 시위를 벌였다. 미국인들은 일본계 미국인이나,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적대감을 갖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맞는 말일 것이다. 영화에서 진주만 폭격 당일 아수라장이 된 병원에 실려온 부상병은 '아시아계' 의료진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영화적 캐릭터는 창조되었겠지만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러한 추악한 역사적 왜곡은 없다. 영화의 기본 소재가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0년 전, 그날 진주만에서는 21척의 미군 전함이 침몰되거나 파손되었고, 약 200대 의 전투기가 창공으로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활주로에서 고철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아리조나처럼 바다 밑으로 수장된 미군 전함에는 아직까지 인양하지 못한 1,177명의 수병이 잠들어있다. 이처럼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은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아마겟돈>, <더록>, <콘에어> 같은 전형적인 오락대작을 만들었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그의 명콤비 마이클 베이 감독, 그리고, 각본을 맡은 랜달 왈라스는 이 엄청난 진주만의 역사적 사실을 60년이 지나서 최첨단 기술로 오늘날에 재현해 낸 것이다. 단지 두어 시간동안 계속된 진주만 공습은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족했다.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거듭하여 "이 영화는 역사 다큐멘타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강조했다. 전쟁에 내던져진 청춘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엮이는 삼각관계 등은 인간사의 한 모습 아닌가.
<애수(워털루 브릿지)>나 <하노버 스트리트> 등 전쟁을 다룬 멜로물은 결국 전쟁이 갈라놓은 연인의 이별과 죽음, 오해 등이 수놓는 가슴 아픈 운명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그린 전쟁의 공포도 아니고, 테렌스 말릭 감독의 <씬 레드 라인>에서 보여주는 광기에 처한 인간존엄성의 문제도 아니다. 전쟁의 장대한 화폭에 그린 연인들의 사연과 그들이 펼치는 놀라운 애국심에 대한 찬양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는 많은 캐릭터는 역사적 실존 인물에 기반을 둔다.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에 의지하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물론, 일본 야마모토 제독이나, 수심이 얕은 진주만에 어뢰공격을 위해 나무판 아이디어를 낸 일본군 미노루 겐다도 실존인물이다. 쿠바 구딩 주니어가 맡은 흑인 취사병 밀러도 실존 인물이다. 갑판 청소부였던 그는 진주만 폭격 당시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호의 함장의 목숨을 구해내고, 50밀리 대공포로 일본군 전투기 2대를 격추시켜 훈장을 받았던 실존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가장 의문을 가질 후반부 '동경 폭격작전'의 실제여부이다. 미국에서도 '진주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듬해 있었던 동경 폭격작전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지미 둘리틀 중령(알렉 볼드윈)이 이끄는 일종의 자살특공대가 실제 있었다. 진주만이 폭격당한 후 정신적 패배감과 그후 연속되는 태평양전투에서 패배한 미국은,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민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과감한 군사작전을 원했고, 이처럼 둘리틀 중령의 동경폭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1942년 4월 18일, 항공모함 호넷 호를 타고 일본해 후방 670마일까지 근접하여 출격한 둘리틀이 이끄는 16대의 폭격기 B-25는 동경의 군수공장을 폭격한다. 그리고 기수를 돌려 중국으로 향한다. 이 작전을 수행한 16대의 폭격기에 올랐던 용감한 미군인 중 일부가 가까스로 중국까지 다다랐다.
물론, 이 영화의 연애담은 캐릭터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구실을 할 뿐, 전체 영화를 끌고가는 힘은 미약하다. 관객들은 드라마에 연연하기보다는 장대한 전쟁씬을 기다릴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살아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라이언 일병구하기>에서 저격수로 나왔던 '베리 페퍼'라는 배우를 눈여겨본 영화팬이 있었듯이 이 영화에서는 대니 역을 맡은 조쉬 하트넷의 우수어린 분위기에 매료될 영화팬이 있을 것 같다.
◇ CG가 만드는 리얼 War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에서 거대한 배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장면을 초대형 스크린의 극장에서 본 관객들이라면 헐리우드가 선사하는 엄청난 영상화면에 일종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미니어쳐'의 조잡한 카메라 기술이 아니라, 마치 실제 배를 두 동강이 내어버리는 듯한 현장감을 극장에서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타이타닉> 이후 4년. 헐리우드의 CG기술은 그동안 끊임없이 진보하여, 커다란 배 한두 척이 아니라, 진주만에 정박해 있었던 그 수많은 전함들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기지에 정렬해 있던 수백 대의 전투기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잔해로 만들고 만다. 관객들은 비교적 지루한 드라마 구조 끝에 만나게 되는 이 엄청난 화력의 전쟁씬에서 몸서리치는 영상경험을 하게된다.
이 영화는 그동안 발전한 헐리우드의 CG기술 뿐만 아니라, 하와이의 미해군 항공모함 위에서 대규모 시사회를 하는 것과 같은 헐리우드의 초특급 마케팅 전략이 펼치는 전형적인 블럭버스터이다. 개봉후, 한동안 주위 사람들이 <진주만> 이야기를 할때 소외감을 느낄 사람이라면 분명 <진주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팍스 아메리카의 싸구려 휴머니즘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영화를 절대 보지 말기를 권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쓸데없이 남의 나라 애국심 고취 오락영화에 딴지 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40분동안 펼쳐지는 진주만 공습장면은 정말 장관인 것은 사실이다. 우와! (박재환 200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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