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스토커] 지상의 피조물

2013. 3. 6. 16:51미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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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도로 변, 바람 부는 언덕에 한 소녀가 서 있다. 바람에 갈대가 마구 춤을 춘다. 아마도 이 소녀는 방금 무언가 특별한, 어쩌면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 것 같다. 영화는 저 소녀가 왜 저렇게 서 있는지를 이제 보여줄 것이다.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블라우스, 아버지의 허리띠, 그리고 삼촌이 사준 신발을 신고 있다.”고.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의 미스테리에 가득찬, 하지만 어찌 보면 진부한 도입부이다. 이 이야기는 스토커(Stoker) 가문의 이야기이다.

 

소녀, 섹스보다 살인을 먼저하다

 

특별히 어느 연대, 어느 지역이랄 것 없다. 미국 소녀 인디아 스토커(미아 와시코우크사)는 18살 생일을 맞는다.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터뜨린다. 박찬욱 감독 팬이라면 아마도 여러 가지 해석이 따를 것이지만 결국엔 그녀의 발이, 육신이 또 한 해가 지난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소녀의 침대를 빙 두를 만큼 차례로 사이즈가 커가는 옥스퍼드 단화가 보인다. 소녀는 누군가가 선물했을 똑 같은 디자인의 신발을 신고 있다. 그날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다. 무슨 일인지 먼 곳으로 떠났던 아버지. 사고현장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끔찍하게 타 버렸다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침울한 장례식. 언제나 자신을 데리고 사냥에 나가서 ‘언제 방아쇠를 당겨야 가장 적합한지’를 알려주시던 아버지의 장례식. 남편의 죽음. 엄마 에블린(니콜 키드먼)의 상복은 고혹적이다. 아버지의 묘지에서 한 남자가 보인다. 찰리 스토커(매튜 굿). 처음 보는 남자. 그런데 아버지의 동생, 즉 인디아의 삼촌이란다.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자캉 여사에게서 불어를 배웠었지...”라는 말을 듣는다.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그렇게 그들의 저택에 들어온다. 젊고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찰리. 급하게 고모가 찾아온다. 고모는 ‘찰리’에 대해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만 찰리가 입을 막는다. 영원히! 그러고 보니 일하는 아주머니도 어느 순간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찰리를 둘러싸고 묘한 긴장감이 넘쳐난다. 에블린은 찰리에게 유혹의 시선을 던지는 듯하다. 스토커도 찰리의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도 점점 빠져드는 듯하다. 삼촌 찰리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곳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곳에서 돌아갈 때 누구를 데려갈지... 스토커 가문의 적막한 집을 배경으로 스산한 바람이 분다!

 

박찬욱 스타일, 섹스리스 킬러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전과 후가 확실히 다른 감독이다. 감독 데뷔 전에는 소문난 영화매니아였고 학구파였던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몇 편의 작품을 내었지만 전혀 대중적이질 못했다. 그리고 ‘JSA’로 흥행감독이 되고나서는 완전히 자신의 미학세계를 구축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이렇게 세 편을 통해 박찬욱 감독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감독으로 우뚝 섰다. 이야기로 보자면 신문 사회면에서 오려낸 기이한 스토리의 복수와 집착, 갱생의 드라마들이다. 작품들에는 근친상간과 살인, 종교모독, 죽음 등이 불순물과 함께 용해되어 있다. 그런 그만의 스타일을 인정받아서인지 박찬욱 감독을 할리우드로 진출했고 ‘스토커’를 찍게 된 것이다.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하여서 말이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스토커의 시나리오가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의 남자 주인공으로 유명한 웬터워스 밀러의 작품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분위기가 가득한 시나리오를 받아 쥔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어둠과 절제된 카메라, 그리고 영화팬에게 해석을 강요하는 여러 장면을 삽입하여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인디아는 적어도 학교에선 퀸카는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캐리’는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소녀의 성장기를 다루면서 흔해 빠진 첫 생리의 충격이나 첫 경험의 광기를 다루진 않는다. 나란히 놓인 신발과 메트로놈의 작동만으로도 충분히 소녀의 상황을 상징한다. 박찬욱 감독의 과잉일 정도의 집착은 인디아가 에블린의 머리를 빗질하는 컷이 울창한 나뭇잎의 출렁임으로 자연스레 넘어갈 때 절정을 이룬다. 삼촌이 정신병원에서 잘(?) 적응했듯이, 아버지가 실용적인 생존의 비결을 전수했듯이 소녀는 대도시에 나가더라도 잘 살아갈 것이다. 박찬욱이 만들진 않더라도 속편의 속편까지의 이야기를 자아내면서 말이다. 소녀의 성장은 스토커 가문의 유지인 셈이다. 드라큘라 가문의 이야기처럼. (박재환 20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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