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는 1995년 일본을 뒤흔든 신흥종교단체 옴 진리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하다. 이들은 도쿄 지하철에 사린 독가스를 뿌리는 등 세계종말론을 내세우며 혹세무민한 사이비 광신도 집단이었다. 소설 <1Q84>에서 그런 종교단체의 리더가 이런 말을 한다. “종말이라는 것을 내세운 종교단체는 모두 사기일 뿐이야.” 심심찮게 등장하는 지구 종말은 확실히 종교적이거나, 거대한 사기극이다. 항상 있어온 여러 지구종말론의 가장 최신버전은? 바로 2012년 12월 21일이다. ‘고대 마야 문명’이 콕 집었다는 바로 그 날짜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다. <인디펜던스 데이>와 <투모로우> 등 지구종말론엔 일가견이 있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 보기 전에 먼저 마야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자.
BC 3114년에서 시작 AD 2012년 12월 21일 지구종말
마야문명은 BC 1,000년경에 중앙아메리카 - 지금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근처 -에 존재하고 있던 문명이다. 아즈텍과 잉카와 함께 신비로운 고대문명으로 치부된다. 서기 7세기 경에 사악하고 탐욕스런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고 말았다. 야만을 몰아내고 기독교를 심는다는 위대한 명분하에 말이다. 그들의 휘황찬란했던 문명은 일시에 종말을 맞고 그들이 세운 거대한 건축물들은 잡초 무성한 폐허가 되어갔다. 그리고 수백 년이 다시 흐른 뒤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아 폐허 속을 뒤지며 그들 고대 문명의 신비를 하나씩 끄집어내었다.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놀라운 발견 중의 하나가 이른바 마야 달력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1년은 365.242199로 보고 윤년을 설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시간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들은 놀랍게도 20진법을 사용했고, 260일 주기의 달력을 사용하는 등 우리와는 다른 달력계산법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달력이 요즘 주목받는 것은 그 달력의 끝-마지막 날-이 우리의 서기력으로 환산하자면 2012년 12월 21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옛날 마야 사람들의 달력의 마지막 장이 오늘날 우리 지구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 마야 달력의 첫 장은 언제인가. BC 3114년 8월 13일에 해당한단다. 마야인들의 달력은 그들이 존재하기 2천 년 전부터 카운팅되어, 그들이 사라진 수백 년 뒤의 종말의 날짜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2012년 12월 21일이 지나면 어찌 되는가? 암흑이 되어 종말을 맞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으니 맘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된다. 고대 마야의 천문대 공무원들이 살아남았다면 어떤 준비를 할까. 아마도 “우리 마야달력은 주기가 5천년 짜리라서 다시 0001년 01월 01일로 리셋하면 됩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음모론자나 미스터리 좋아하는, 혹은 사회 불순세력은 여기에 희한한 가설을 집어넣었다. 고대 마야인들이 다섯 번 주기가 끝나면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그리고 여기에 신이 난 일부 천문학자들이 또 다른 무서운 천체현상을 결부시킨다. 2012년 12월 21일의 다음날, 동지에는 태양이 은하수의 중간지점인 ‘스타게이트’와 일치하게 된다고. 천체에서 이런 일렬 위치는 25,800년에 한번 있는 현상이라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 어찌 되긴 지구가 멸망한단다. 지구가 멸망하면 어찌 되는데? 어찌 되긴 다 죽는 거다. 그러니 가진 재산 다 팔아치우거나 우리 종교단체에 헌납하면 천국에 갈 것이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신의 계시가 주어졌단다. 어찌 많이 들어본 종말론이다. 할리우드에선 바로 이 2012년 종말론으로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 이름도 거룩한 <2012>이다.
할리우드 디제스터 무비
할리우드가 이 신나는 ‘지구 종말 쇼’를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영화로 만들었다. 적어도 지구종말을 앞두고 3년치 마케팅은 끝났다. 앞으로 3년 동안을 실컷 팔아먹을 수 있는 아이템인 것이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지난 수년간 지구를 뒤숭숭하게 만든 온갖 재앙의 진로를 한 번에 정리한 셈이다. 아프가니스탄도, 이라크도, 지구온난화도, 인터넷의 재앙도 모두 2012년 12월 21일을 향해 수렴되는 것이다. 한 번의 완벽한 ‘지구세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 것이다.
영화는 할리우드 최상급 CG를 보여준다. 우리가 만든 <해운대>를 그들이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장비와 더 큰 상상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고편을 보시라. 이런 영화는 거의 “예고편이 모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제 이 영화의 기자시사회는 영등포에 새로 생긴 영등포 CGV의 스타디움 관에서 진행되었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으로 등록되어있다는 바로 그 극장이다. 롤랜드 에머리히 작품에, 그리고 지구종말의 장엄한 영화에 딱 맞는 상영관 아닌가. 이전에 대한극장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볼 때나 <타이타닉>을 보면서 입이 쩍 벌어지던 시각적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초지구적 규모의 자연재앙에 할 말을 잃을 뿐이리다. 도로가 갈라지고, 빌딩이 무너지고, 다리가 내려앉는 것은 애들 장난이다. 미국 백악관이 박살나고, 대륙이 사라져버리고, 에베레스트산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영상에 “아이고 맙소사. 이젠 월드 트레이드 센터 하나 쯤 무너져 내려도, 개미 한 마리 죽는 것 같은 감정 밖엔 느끼지 못하겠구나”는 생각이 든다.
패밀리의 소중함, 희생의 고귀함
<2012>는 잘 안 팔리는 작품을 쓰는 작가 잭슨 커티스(존 쿠삭)의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남자는 이혼남이다. 소설은 잘 안 팔리고, 알바로 갑부의 운전수를 하고 있다. 주말엔 이혼한 아내가 데리고 있는 아들, 딸과 함께 놀려가는 ‘지구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어느 주말, 아들딸을 데리고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 캠핑 갔다가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그곳에서 반미치광이 찰리 프로스트를 만나게 된다. 요약하자면 지구종말이 가까워졌고 정부에서는 비밀리에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결국 지구 곳곳에서 재해가 속출한다.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닥치고.... 그렇다. 정부(미국 정부)는 지구가 심상찮다는 것을 예전에 알고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아마겟돈>에서도 그랬고, <딥 임팩트>에서도 그러했으니 그렇게 특별히 비밀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쨌든 미국 정부는 아주 비밀리에 46개 국가와 공조하여 ‘지구종말의 날’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 스포일러 주의 * 티벳에 거대한 방주를 만드는 것이다. 나무로 만든 배가 아니라, 강력철제로 만든 엔터프라이즈 우주선 급이다. 탑승인원은 무려 40만 명. 그곳에 탑승할 사람과 이동수단 등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설정에 말도 안 되는 결말을 보여주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냥 말 안하고 보고 있으면 된다. 롤랜드 애머리히 감독이 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영상을 충분히 만끽하라는 것이니.
영화는 지구종말의 순간에 임하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온몸을 던지는 희생을, 때로는 혼자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치는 이기심을. 국가지도자나 무리의 리더가 보여주는 결단의 순간도 장엄하다. 국적과 인종, 계급을 뛰어넘는 공조가 필요한 시점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관람법이다.
치웨텔 에지오포라는 흑인배우는 이 영화에서 지구종말의 전조를 발견하는 백악관 과학부 고문 에이드리안 햄슬리 역으로 출연한다. 시간의 종말을 다룬 마야의 예언 책 <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을 쓴 에이드리언 길버트에서 이름을 따온 모양이다. 존 쿠색의 아들 이름은 ‘노아’이다. 노아의 방주에서의 그 노아 말이다. 존 쿠색이 썼다는 책의 제목은 <안녕 아틀란티스>이다. 아틀란티스는 사라진 대륙이다. 아주 높은 문명을 자랑하던 대륙 아틀란티스는 언젠가 바다 밑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중남미로 건너와서 세운 나라가 마야 같은 고대문명국가라는 것이 미스터리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구조이다. 어떻게 하여 타잔 같은 복장을 하고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재단에 바치던 사람들이 BC 3114년에서 시작 AD 2012년 12월 21일까지의 시간개념을 담은 달력을 만들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인데 그런 천문학적 지식을 아틀란티스 사람들이 가르쳐줬다고 생각하는 것이 UFO타고 온 에일리언이 가르쳐줬다는 것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상상력일 터이다.
올해는 서기로 2009년이다. 알려진 대로 예수가 정말 BC4년에 태어났다면 올해는 2012년이 된다. 단군 할아버지가 단군조선을 세운 것을 기준으로 하면 단기(檀紀) 4342년이다. 부처님 오신 날도 기준연도에 이설이 있다. 우리나라 조계종 홈페이지에 보니 올해는 불기(佛紀) 2553년이다. 일본의 천황 기준으로 보면 헤이세이(平成 ) 21년이다. 대만에서 사용하는 연호로는 민국(民國) 98년이다. 그러고 보니 북한에서 사용한다는 김일성 기점으로도 ‘주체’ 98년이다. 뭐, 이런 다양한 연도가 있다 보니 마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고 본다.
영화는 너무 어마어마한 영상의 나열이라 팝콘 먹으면서 웃고 즐기고 떠들거나 할 심적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너무 심각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의 지구는 미소 핵무기 경쟁에서도 살아남았고, 후세인이나 탈레반이 있어도 건재하니 말이다. 현재로선 전 지구적 규모의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마야인들의 예언이 그나마 확실한 모양이다. 영화 보고 나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난 뭘 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사과나무를 심을까? 아마, 종로엔 접근조차 할 수 없겠지. 너무 붐벼서. 하루하루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by 박재환 200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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