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4. 14:08ㆍBook
중국소설을 시대적으로 분류할 때 당대문학이 있다. 당연히 양귀비가 살던 당(唐:Tang)나라 시대인 당대(唐代)문학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선 당대(當代)문학이라고 하면 작금의 시기를 일컫는다. 처음엔 헷갈리기도 한다. 지난 주말, 중국의 당대(當代) 소설을 한편 읽었다. <언어 없는 생활>이란 중편소설이다. ‘東西’라는 작가의 2006년도 작품이다. 작가의 이름이 특이했다. ‘東西’(중국어로는 ‘뚱시’라고 읽음)라고 하면 동서남북의 방향을 의미하기보다는 ‘물건’을 일컫는다. 그것도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한 시절을 풍미했던 “애 뭐야?”라는 의미가 내포된 “이건 웬 짜장?”할 때처럼 “웬 놈?”이라는 그런 ‘물건’을 말한다. 필명을 참 장난스레 지은 셈이다. ‘뚱시’의 본명은 멀쩡하게도 전대림(田代琳,톈다이린)이란다. 1966년 중국 광서(廣西,광시)성 출신이다. 중국에선 196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등단한 작가를 신생대(新生代)작가라 부른다. 중국문학사 이야기를 하자면 이들 신생대는 선배세대와 그 이후 세대인 ‘90後 작가’ 사이의 낀 세대로 논의된다. 어쨌든 ‘당따이’의 ‘신썽따이’ 작가 ‘뚱시’의 신작을 읽어보자.
<언어 없는 생활>의 원제도 <没有语言的生活>이다. 언어-말-가 없는 생활이라니? 그렇다. 말 못하는 사연을 가진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중국의 어느 시골, 아주 아주 벽촌마을이 배경이다. 왕라오빙 영감은 다 큰 아들 왕자콴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왕자콴은 ‘귀머거리’이다.
(여기서 잠깐... 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문학적 특수성 때문에 ‘귀머거리, 장인, 벙어리’ 같은 용어를 썼다. 전혀 장애인을 폄하하거나 무시해서 이런 용어를 쓴 것은 아니다. 토속적 어감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니 이해 바란다)
영화로 따지자면 스포일러.. 소설내용이 요약되어 있음
왕씨네 부자(父子)는 산비탈 옥수수 밭에서 잡초를 솎아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잘못하여 벌집을 쑤시는 바람에 벌떼 공격을 받게 된다. 아버지는 고통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지만 껑충 키가 큰 옥수수 밭에는 적막이 흐를 뿐이다. 귀머거리 아들 왕자콴은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눈까지 쏘인 왕라오빙은 그날로 시각을 잃고 장님이 되어버린다. 아들은 선천적 귀머거리라서 들을 수가 없고, 아버지는 후천적 시력상실로 말은 할 수 있지만 앞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이 불쌍한 부자가 어떻게 살아갈까. 아버지와 아들은 여전히 단 둘이서 함께 살아간다. 젊은 왕자콴을 불쌍히 여긴 마을 사람이 신붓감을 알아보지만 왕자콴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을의 소문난 여자 ‘주링’이 은근히 맘에 들지만 주링은 동네 유부남과 염분이 났고 애까지 갖고 말았다. 어느 날 왕자콴의 오두막집에 한 여자가 온다. 붓 파는 여자 차이위전이다. 위전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서로의 처지를 이심전심으로 아는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어두운 가족을 이룬다. 주링이 우물에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왕씨네 부자는 시끄러운 이 동네에서 살 수가 없었다. 이들 기이한 가족은 '“이 동네는 우리가 살 곳이 못 되”하며 다리를 건너 묘지 쪽으로 이사를 간다. 위전에게 흑심을 품은 마을 남자 하나가 한밤에 그녀를 덮치던 날, 그녀는 고함도 제대로 지를 수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을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다. 세월은 흘러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자 학교에 보낸다. 학교 다녀온 첫날 아이가 학교에서 배워온 말인즉슨 “차이위전은 벙어리. 귀머거리와 한집에 산다네. 둘이 낳은 아이는 벙어리에다 귀머거리라네.” 아이는 그렇게 자랄 동안 자신의 엄마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노랫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기막힌 노랫말의 의미를 알게 된 후 그 아이는 눈과 귀와 입을 달아버린다.
이 소설은 굉장한 우화집이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불편을 말하는 것도, 그런 상황에서 세상이 더 행복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촉구하는 복지지향의 계몽소설도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렇다.
위전이 바람소리에 빨래를 걷으러 갔다가 남자에 의해 봉변을 당하는 순간이다. 벙어리 위전이 위기의 순간에 남자의 얼굴을 할퀸다. 나중에 마을에서 얼굴상처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남자의 까칠한 턱수염도 느꼈다. 왕자콴은 차이위전의 상처투성이 젖가슴과 갈기갈기 찢긴 바지를 보고 기겁한다. (번역본 63쪽부터)
(귀머거리)아들: 아버지 위전이 무슨 일을 당했나봐요.
(장님)아버지: 어서 물어봐라. 어떤 놈이었는지
(귀머거리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위전을 부른다)
(장님)아버지: 위전, 이리 좀 와보아라. 겁낼 필요 없다. 어차피 난 아무것도 안 보이니.
귀머거리 아들과 장님아버지, 그리고 능욕 당할 뻔한 벙어리 며느리의 서글픈 상황극이 펼쳐진다
아버지: 누구인지 정확히 봤니?
(차이위전 고개를 저었다)
아들: 아버지, 위전이 고개를 흔들었어요.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고.. 혹시 그 놈 몸에도 상처가 남았어?
(이번에는 위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들: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아버지: 상처가 어디에 났니?
(차이위전은 두 손으로 얼굴을 할퀴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들: 이번에는 손으로 얼굴을 할퀴었다가 턱을 만졌어요
아버지: 얼굴하고 턱에 상처를 냈어?
(그녀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다가 다시 양옆으로 저었다)
아들: 끄덕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흔드는데요
아버지: 그 놈 얼굴을 할퀸거야?
(위전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또 끄덕거렸어요
아버지: 그리고 턱도 할퀴었나?
(위전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 고개를 흔들었어요
(수염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왕라오빙의 뻣뻣한 수염을 어루만졌다)
아들: 아버지 수염을 만지는데요
아버지: 그 남자 얼굴에 수염이 있었다는 거냐?
(위전이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들: 끄덕거리고 있어요
아버지: 휴, 그 놈 얼굴에 할퀸 상처와 수염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도 자콴(아들)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신고할 방법이 없구나. 내 눈이 이러니 잡을 수도 없구나. 어쩌겠나. 액땜한 셈을 치자꾸나.
(차이위전은 결국 서러운 울음을 꺽꺽 쏟아냈다. 왕라오빙의 눈언저리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주름이 깊게 팬 뺨을 타고 내려와 입가의 수염을 적시고 있다)
이 한 페이지만 읽어도 이 소설이 전하는 부조리함과 묘한 앙상블을 느낄 수 있잖은가. 읽으면서 가족의 의미와 약한 자의 자기본능적 뭉침을 볼 수 있지만 단순한 은유가 아닌 것은 명확하다. 신체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누던 시절이 있긴하다. 문학적인 수사로 보자면 이들 가족-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은 비정상인이다. 그들은 정상인들 사이에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은 그들에게 사기당하고, 놀림당하고, 경멸당하였으며, 도둑질 당한다. 그리고 강간까지 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들에게 천국이 있다면 아마도 정상인이 없는, 정상인이 결코 그들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는 다리 건너 산속의 작은 집일 뿐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서로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완벽한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그럼 철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는 이 이상한 세계에 던져진 천국의 아이의 미래가 걱정된다.
이 소설은 중국의 문학잡지인 <<수확>>(收穫) 1996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노신(魯迅,뤼쉰)문학상 중편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천상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작년에는 20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중국 CCTV를 통해 방송되었다.
강경이의 맛깔스런 번역이 작품을 더욱 빛낸다
이번 중국소설을 읽다가 무척 놀란 것은 언어가 통통 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중국소설’같지 않았다. 의성어, 의태어를 옮기는 번역자의 문장력/어휘력이 감탄할 정도였다. ‘강경이’ 라는 분이 이 소설을 한글로 옮겼다. 내가 감탄한 문장을 몇 개를 추려본다. 이렇게 우리말 번역이 아름답다니. 인터넷을 뒤져 중국어 원문을 직접 찾아 도대체 중국어표현은 어땠는지 알아보았다.
- 한 이십여 미터를 굴러갈 때까지도 벌떼는 집요하게 달라붙은 채 검은 먹구름마냥 그의 머리 위를 맴돌며 옥시글대고 있었다. (9쪽)
(大约滚了二十 多米, 他看见蜂团仍然盘旋在他的头顶,蜂团像一朵阴云紧追不舍.)
- 사람들이 하나둘 물러가고 왕자콴만이 화롯가에 우두망찰하게 앉아 있었다. (33쪽)
(人群从朱家一一退出,只有王家宽还坐在火堆边)
- 마을입구에는 어느새 울레줄레 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38쪽)
( 村头站满参差不齐的人群)
- 수런대는 소리가 왕라오빙의 귓가에 정신없이 갈마들었다. (39쪽)
(王老炳听到杂乱无章的声音,声音有高有低)
- 사위어가는 햇살이 개들의 누런 털에 내려앉았고 산비탈에는 한없는 정적이 맴돌았다 (42)
(太阳的余光撒落在两只黄狗的皮毛上,草坡上下很安静)
- 주씨 영감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더께 앉았던 먼지가 그의 주변으로 뿌옇게 일어났다. (49)
(朱大爷正在扫地,灰尘从地上冒起来,把朱大爷罩在尘土的笼子里。)
- 살천스러운 가을바람이 밤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하천 주변과 집 주위를 ‘쏴아’ 훑고 지나갔다. (61)
(秋风像夜行人的脚步,在河的两岸在屋外沙沙地走着。)
그런데 제일 놀라운 것은 ‘헤드’라는 옮긴말이다.
-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 헤드 위에 앉아 침대를 흔들며 계속해서 ‘어버어버’소리를 냈다.. (47쪽)
(床板在她坐下来时摇晃不上,并且发出吱吱呀呀的响声)
아마 'head'인 모양인데 왜 이런 말을 썼을까. 궁금해 미치겠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출판된 이 책에는 <언어 없는 생활>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뚱시’중편소설이 수록되어있다. (언어없는 생활(没有语言的生活), 느리게 성장하기 (慢慢成长), 살인자의 동굴 (原始坑洞), 음란한 마을 (嫖村) 시선을 멀리 던지다 (目光愈拉愈长) 물론 난 <언어 없는 생활>만 읽고는 “뚱시‘의 문학세계와 ’강경이‘의 번역솜씨를 칭찬하고 있는 셈이다. ^^ 일독을 권한다. (박재환 2009-1-14)
인터넷에서 찾은 중국 원서 표지
20부작 드라마.. 잠깐 찾아보니.. 내용이 굉장히 많이 바뀐 듯.영화 <천상의 연인>에는 유엽과 동결(뚱졔)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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