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0. 15:16ㆍBook
이 달 초 KBS에서는 공사창립특집 TV문학관으로 김훈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을 방송했다. 이 드라마는 찍기는 한참 되었고 방송 날짜를 미루어지다가 이번에 방송된 것이다. 방송 소식을 듣고 바로 김훈 소설을 찾아 읽었다. 난 제목이 가물거려 원래 이게 김훈의 또 다른 소설 <화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언니의 폐경>과 <화장> 두 편을 모두 보게 되고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화장>은 2004년 28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품이며, <언니의 폐경>은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이다.
화장 : 중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화장>의 남자주인공은 화장품회사 중역이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는 2년 여 투병 끝에 방금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은 아내의 병수발로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도 지독한 전립선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딸은 두 달 후 결혼과 함께 유학 가는 남편 따라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회사는 그에게 아내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그가 결정을 내려야할 큰 일거리가 있다. 곧 여름 화장품 마케팅 시즌을 앞두고 중대결정을 내려야한다. 장례식 준비도 해야 하고, 전립선으로 고통도 받아야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그 급박한 와중에 회사의 한 젊은 여자 사원 ‘추은주’에 대한 알 수 없는 강한 욕망도 떠오른다. 아내를 화장터로 보내고, 아내가 키우던 늙은 개도 동물병원에서 안락사를 시킨다. 그리고 중요한 마케팅 관련 결정을 내리고 그 날 밤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이룬다.
언니의 폐경: 언니의 폐경, 나의 이혼
50 후반의 언니에게 폐경은 갑작스레 다가온다. 형부가 비행기사고로 죽은 날 차안에서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다. 유산과 보상금은 시댁과 아들에게 거의 다 떼어주고 이제 10평 대 아파트에서 인생의 말년을 고즈넉이 살아갈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50 초반의 나는 남편에게서 이혼을 통보받는다. 남편의 옷에서 다른 여자의 체취를 느꼈어도 그냥 넘어갔건만. 이제는 제사 많고 말 많은 시댁에 찾아가서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유학간 딸도 아빠와 엄마의 이혼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한 남자를 사귀게 된다. 그이는 아내를 사별하고 이제는 회사에서도 명퇴당한 불쌍한 중년이다. 언니와 나는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김훈, 이 시대 최고의 문장가
내가 김훈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국일보’ 기자시절 날렸던 문학담당 기자가 아니다. 기억은 난다. 그 당시 월화수목금.. 매일 문화면이 다채롭게 꾸며졌었다. 문학, 공연, 종교, 미술, 영화.. 식으로. 아마도 장명순 편집장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땐 난 중고교시절이었다.) ‘그렇게도 유명했다는’ 김훈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해 (아마 2000년 즈음) 편의점에서 시사주간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당시 내가 주로 읽던 시사주간지는 <<시사저널>>과 <<한겨레21>>이었다. 김훈은 당시 시사저널 편집장이었고 두 잡지는 비슷한 논조의 경쟁지였다. 정말 기이하게도 김훈은 경쟁 잡지의 인터뷰에 직접 나선 것이다. 인터뷰이는 김규항 씨랑 역시 그 유명한 ‘최보은’이다.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두 잡지를 찾았다. 김훈은 <시사저널> 2000년 12월 14일자까지 편집장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김훈의 그 말 많은 <한겨레21> 쾌도난마 인터뷰 기사는 2000년 10월 5일자에 실려 있다.
그 때 그 인터뷰를 보았을 때 난 정말 놀랬다. 우와.. 잘 나가는 주간지, 의식 있는 시사잡지 편집장은 말을 이렇게 거침없이 하구나라고. 그의 거침없는 말은 적어도 ‘페미니스트’나 이 땅의 ‘문화공작자’에겐 충격이었을 것이다. 마치 한국 전통가문의 가부장의 최전선에 선 마초맨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도 그는 여지없이 자신의 스탠스를 노출시킨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그 사람 취향이 원래 그랬는지.. 그 사람은 ‘물의를 일으키자’ 변명도 없이 그냥 사표 던지고 언론계를 떠나버린다. 그리고 소설가로 전향한 것이다. (그는 그 후 얼마 있다 놀랍게도 ‘한겨레신문’ 사회부기자로 필드에서 또 그의 반짝이는 문재(文才)와 예사롭지 않은 삶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가 낸 소설은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이다. 그가 그 소설로 엄청나게 많은 원고료 수입을 챙겼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다. 얼마 전 그는 조선일보 주말판 인터뷰에서 소설 많이 팔려 1000만원이 호가하는 자전거를 샀다고 한다. 그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지 않는다. 기자 시절에도, 소설가 시절에도 그는 항상 연필을 사용한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스테들러(STAEDTLER) 노란색 연필이 왜 그리 폼 나는지. 마치 더티 해리 때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매그넘44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김훈의 다 알려진 그의 사고방식은 소설작품 속에서는 치열하게 되살아난다. 알 수 없는 정체성은 적어도 작품 속에서는 정반대편에서 자유롭게 역사를 관조한다.
<칼의 노래>를 처음 봤을 때 그 비릿한 글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글에선 비린내가 진동한다. 간결한 문장 뒤에는 시퍼런 칼날이 있다. 그는 그 칼날로 피부에 작은 칼자국을 낸다. 그리고는 작은 숟가락으로 인체의 구멍에서 섞은 고름을 한 국자 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특히나 여성의 은밀한 신체부위에 문학적 메스를 가한다. <칼의 노래>에서도 그걸 느꼈는데 <화장>에서도 나온다. 화장품 회사 중역이 이번 여름에 내놓을 신상품 중에는 질 세척제가 있다. 김훈의 질 세척제는 마치 ‘의학사전’에서 그래도 옮겨놓은 것처럼 가치중립적 건조함이 나열된다. 그리고 지역 총판장들과 룸살롱이라도 가면 ‘곤쟁이젓 냄새’ 이야기를 한다. 그는 관찰자이면서도 무의미하다. ...“그들의 말은 그야말로 스모키하게 들렸다. 헛것들이 사나운 기세로 세상을 휘저으며 어디론지 몰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김훈은 ‘세상의 헛것’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언니의 폐경>에서는 여성의 종말에 대해서라도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는 언니의 폐경으로 가는 마지막 생리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마치 ‘비상사태 발생 시 생리대 사용법’이란 사용설명서를 만들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언니의 폐경>에서도 ‘헛것’이 등장한다. 딸을 임신하고는 흙을 집어먹고 싶어 하는 충동. 그리고..“... 그 헛것의 헛됨이 명료할수록, 헛것을 향한 몸의 충동은 더욱 간절했다..” 같은 인생의 루저에게서 듣는 애매모호한 상황의 설명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아마 그는 그의 문학인생의 여로가 그런 곤쟁이젓 냄새가 나는 헛것의 세상에서 저절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화장>의 마지막 문장은 "내 모든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이며 <언니의 폐경>의 마지막 문장은 “내 옆에서 언니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이다.
김훈의 <남한산성>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얼마나 우리의 역사와 우리들 자신을 조롱할지 말이다. (박재환 2009-3-10)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中國電影百年] 중국영화 100년의 연대기 (0) | 2009.06.03 |
---|---|
[香港電影史話- 余慕雲] 홍콩영화사 무성영화시기 (0) | 2009.06.03 |
直面 張藝謨] 장예모 직격 인터뷰 (0) | 2009.06.03 |
대만전영:정치경제미학 1949~1994] 대만영화사개론서 (0) | 2009.06.03 |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 (0) | 2009.03.12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영화 '더 리더'에 나오는 안톤 체호프 단편소설 (0) | 2009.02.24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거꾸로 간다] (F.스콧 피츠제럴드 원작소설) (0) | 2009.02.16 |
[레베카] '레베카' 악령 벗어나기 (대프니 듀 모리에 소설 1938) (1) | 2009.01.19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옌롄커) 그래서. 몸을 바쳤다... (1) | 2009.01.19 |
[언어없는 생활] 환상의 트리오 (0) | 2009.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