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게이샤의 추억] 서구인의 일본보기 (아서 골든 Memoirs of a Geisha)

2008. 3. 11. 19:36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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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1999.3.6.) 엊그제 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필버그 아저씨가 <라이언일병 구하기>로 또 다시 감독상을 탔다. 이제 그를 단순히 ‘흥행의 귀재’, ‘엔터테이너’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훌쩍 성장해버린 영화신동이다….그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차기작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게이샤의 추억>이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몇 달 전 김희선이 여기에 출연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와서는 잔뜩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물론 배역은 다른 사람 – 홍콩배우 장만옥에게 넘어가고 말았다.(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장만옥도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2001.6.9. 현재)

 

[게이샤의 추억] 기생, 창녀, 그리고 게이샤 (롭 마샬 감독 Memories Of A Geisha 2006)

(박재환 2006.1.18.) 아서 골든이 쓴 소설 <게이샤의 추억>을 읽은 것은 7년 전의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을 맡을 것이라 하여 호기심에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한국의 김희선, 홍콩의 장만옥 등이 스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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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가 새로운 세기 2000년 개봉예정으로 만들고 있는 <게이샤의 추억>이란 영화는 분명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제작자와 영화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리다. 아마 다음 세기의 지성계, 문화계, 영화계의 화두는 분명 오리엔탈리즘이 될 것이다. 그것은 ‘서구문화의 종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인류문명’을 위한 탐색쯤으로 이해해야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신문화 쪽은 섣부른 결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말이다. 서구인의 포커스가 어디를 맞출 것인가. 그것은 디즈니의 <뮬란>처럼 중국이 되거나, <게이샤의 추억>처럼 일본이 될 수도 있다. 한 국가의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인들은 이제 그 거대한 새로운 문화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스필버그가 어떠한 시선으로 동양을 볼지는 미지수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본 동양은 대략 윤곽이 나온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이해를 필요로 하는 ‘異문화의 특이성’인 것이다. 전지구화, 동시성화 되어가는 현대는 이러한 이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를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 아니, 아직은 이 소설을 읽어본다는 것은 흥미진진할 뿐더러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게이샤의 추억>을 읽기 전에 게이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아주 한정되어 있다. 게이샤는 ‘기생’ 아냐? ‘창녀’와 동급인 것 아냐? 그리고 일본의상에 대해선 전혀 모르면서도, 기모노에 대한 환상적 해석 – “일본인은 섹스를 좋아해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그 짓을 하지. 여자는 그 대상물이지. 그래서 일 치르기 좋게 고안된 옷이 기모노야. 기모노는 앞쪽만 펼치면 바로 되거든..” 물론 이건 잠깐만 생각해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민족고유의 의상이란 것이 하루 이틀에 고안된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 진실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 남성에게는 통용되는 일본환상/일본몰이해의 한 장명이다. <감각의 제국>을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오해와 몰이해, 무관심의 일본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스포일러: 줄거리입니다]

이 이야기는 1910년대부터 시작한다. 일본 동부의 한 작은 어촌마을의 찢어지게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난 소녀가 도시로 팔려간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두려워한다. 운명을 저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어린 소녀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어진 운명 속에서 몸부림쳐야했다. 그는 게이샤가 된다. 특이하게 예쁜,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가 일본 최고의 게이샤로 성장할 동안에 그는 게이샤 수업 –샤미센 연주, 춤추는 법, 술 따르는 법, 미주아지라는 의식을 치르는 법, 단나를 맞이하는 법, 기타 등등.. 을 배운다. 그리고, 게이샤를 관리하는 오키야와의 관계도 보여주고 말이다. 일본이 패전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훌쩍 나이 들어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그마한 찻집을 하며, 게이샤의 추억을 들려죽는 것이다.

[스포일러: 더 자세한 줄거리입니다]

요로이도라는 어촌마을. 요치라는 소녀에게는 병든 어머니와 평생을 힘든 어부로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나이가 조금 많은 언니가 있었다. 요치의 눈은 보기 드문 회색으로 누구나 한번 보는 순간 반할만한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머니가 위독하고, 아버지마저 병약해진다. 그녀가 사는 집은 그녀 표현대로라면 “바닷가에 위치한 비틀거리는 집”이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나타나서 친절을 베풀기에 ‘아. 저 사람에게 입양되는구나’ 생각했건만, 그녀는 교토지역의 기온이란 곳에 팔려간다. 14살 때쯤. 그녀는 그곳 오키야에서 자기의 운명을 펼쳐나가게 된다. 오키야란 곳은 싹이 보이는 어린소녀를 사다가는 열심히 게이샤 교육을 시키고, 예쁜 기모노도 입히고, 출입처를 확보하여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면 계약에 따라 수입을 나누는 일종의 거간꾼인 셈이기도 하다. 처음에 요치는 하녀로 고생을 하다가 나중에 어떤 기회를 잡아 견습 게이샤가 된다. 요치는 이제 게이샤 이름으로 사유리라 불리게 된다. 그리곤 15세가 되어 미주아지 (고객 중 한 사람에게 처녀성을 받치는 의식) 의식을 치르고, 정식 게이샤가 되고, 오키야의 양녀로 입양된다. 오키야의 양녀가 된다는 것은 그녀의 수입을 이제 100% 떼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일정부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팔려온 이상, 그 빚과 견습생일 때의 수업료는 꼬박꼬박 공제된다. 그리고, 기둥서방을 맞이한다. ‘단나’라는 것이다. 단나는 사유리의 물주가 되어, 매월 일정한 돈을 오키야에 갖다 바치는 것이다. 단나는 결국 큰 회사의 회장의 단나가 된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첩이 되는 것이다.

미주아지와 단나, 그 황당함

소설에서 이해 못할 일본의 이야기로 – 性 풍속도로 – 미주아지가 나온다. 처녀성을 담보로 수많은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이다. 오키야는 몇 군데 의뢰가 들어오면 경매를 붙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돈을 부른 남자에게 사유리의 동정을 받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 날 사유리는 의사의 진찰로 100% 처녀라는 진단을 받아야하고, 이 선택받은 남자는 그런 미주아지만을 찾아 헤매며 기념품으로 혈흔을 모으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일정한 돈을 지불하며 단나라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좀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그런 문화의 특이성일 것이다. 대회사의 회장이 단나를 택하더라도 그 정실부인은 그것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게이샤는 아들을 낳게 되고, 재산권분쟁을 우려하여 미국으로 가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전혀 한국적이지 못한 – 이것은 일본적이라고 말해야지, 그것을 아시아적이라든지 동양적 여성관으로 이해하면 큰 잘못이리라.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어느 정도까지는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한 소녀가 갖은 고난을 겪게 되고, 그러한 고단한 삶의 여정 끝에 얻는 참된 행복과,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감동과 철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어느 페이지부터인가, 알 수 없는 일본인의 더욱더 알 수 없는 집착과 삶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빨리 결말을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일본인들이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떡하면, 예쁜 게이샤를 내 것으로 만들까, 어떡하면 괜찮은 서방 만나서 편한 여생을 보낼까하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배경이 게이샤의 동네이기때문이기고 하지만 말이다. (<감각의 제국>에서 그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짓’뿐이었던 것이 이해가 가는 시대상황이다.)

소설에서 한국 관련해서는 몇 줄 나온다. 사유리의 단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노부상’이 있다. 그는 ‘일본의 조선점령기’ 동안 조선에 주둔하던 군인이었는데 폭발사고로 팔을 하나 잃고 얼굴엔 보기 흉한 상처자국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씀씀이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순정적이다. 마지막에 그는 회장을 위해 물려나고 말이다. 이 영화가 1910년대부터 일본을 관통하지만 군국주의나 천황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스필버그가 <태양의 제국>, 아니 그 이전 오래 전 <1941>이란 영화에서부터 일본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이제 스필버그의 실력을 기대해보자.


내년이면 2000년대이다. 동양문화의 우수성이나, 오리엔탈리즘이의 우월성은 아시아국가 전체의 경제침체라는 것 때문에 빛바랜 감이 없지 않지만, 문화의 영속성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승자란 것이 있다면) 끝까지 지켜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야기는 황제부터, 계집아이(뮬란)까지, 일본이야기는 게이샤까지 다룰게 많은데 왜 헐리우드 사람은 우리 한국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스토리로 <인천상륙작전>이나 뭐 그런 거 생각 못하나? 그것은 우리문화의 지독한 폐쇄성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우선은 그네들이 한국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을 알리고, 한국문화의 특이성(우수성이니, 우월성이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자. 그런 소리 안 해도 된다. 그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이니까 말이다)도 소개하고 말이다………. 아쉽다. (박재환 1999/3/6)

[2009-08-18] 결국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스필버그 대신 로브 마샬이 감독을 맡았고 장만옥 대신 장쯔이가 캐스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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