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마르케스의 이야기

2009. 1. 9. 11:37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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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1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읽었다. 이 책은 최근 민음사에서 조구호 씨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도서관에 찾고자하는 책은 없고 뜻밖에 다른 번역본이 하나 있었다. 차봉희 교수의 번역으로 1982년 샘터에서 출판한 책이다. 당시 번역제목은 <예고된 죽음의 記錄>이다.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독일어 출판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마르케스의 모국 콜롬비아는 스페인어를 쓴다. 차봉희 교수가 번역한 <예고된 죽음의 기록>은 이른바 중역(重譯)인 셈이다.  (내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기에 인명표기는 적당히 옮긴다. 이해바람!)

195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1951년 1월 22일에 발생한 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의대생 ‘까예따노 헨띨레 치멘또‘가 살해당한 것이다. 범인은 마르가리타 치카 살라스의 두 오빠였다. 원래 마르가리타는 ’미구엘 레예스 팔렌샤‘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는데 마르가리타가 처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결혼식 첫날밤 신부는 소박을 맞는다. 신부의 오빠는 여동생의 처녀성을 빼앗은 까예따노를 죽인 것이다.

   작가 마르께스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서 자료조사를 했지만 죽은 자의 어머니가 소설 집필을 극구 만류해서 근 30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마르케스가 바라본 살인의 전말은 어떠했고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살펴보자.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살인사건

  소설은 ‘화자’(나레이터)가 27년 전에 발생한 한 의문의 살인사건의 전말을 더듬어 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실 그 사건은 의문의 살인은 결코 아니다. 해가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녘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곳에서 21살 난 젊은이 산티아고 나사르가 두 남자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마르께스는 죽은 자와 죽인 자, 그리고 죽음을 목격한 자, 죽음을 알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의 그날 행적과 그 전날 모습을 자세히 복기한다. 나사르가 죽는 날 그는 새벽 5시 30분 일어나 집을 나선다. 주교가 배를 타고 이 마을에 들를 것이고 나사르는 그를 보기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이다. 나사르는 집을 나서기 전에 집안의 어린 하녀를 잠깐 희롱한다. 그가 왜 죽임을 당했을까. 전날 이 마을에선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었다. 불과 반년 전에 이 마을에 들른 남자 ‘바야르도 산 로만’이라는 사람이 비카리오 집안의 딸 안젤라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하고 거창한 결혼식이 열렸고 마을의 모든 젊은이들이 술에 만취될 정도로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새신랑 로만은 새신부 안젤라가 처녀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는 곧장 그녀를 비카리오 집으로 돌려보낸다. 비카리오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안젤라는 두 시간이나 흠뻑 두들겨 맞고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작자는 나사르라고 실토한다. 그 길로 그녀의 쌍둥이오빠 페드로와 파블로는 칼을 뽑아들고 응징에 나선다. 첫날밤 신부를 내쫓은 신랑이 아니라 안젤라의 처녀성을 빼앗은 (안젤라가 지목한) 나사르였다. 이들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복수를 다짐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나사르’를 죽이겠다고 공언한다. 해가 뜨기 전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딱 한 사람 나사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사르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노력한 사람도 있었고, 나사르의 집으로 쪽지까지 전달되었지만 ‘운명의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칼날을 피할 기회까지 주어졌지만 운명은 잔혹한 것이었다.

살인의 동기보다 살인의 과정이 기이하다

  사건은 어찌 보면 허망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 유독 한 사람에게만 전달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살인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완벽하게 막지는 못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사르 살인사건은 확실히 전근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이성적이며 폭력적인 살인예고방식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문명화된 인간들의 인지력으로 제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나사르의 죽음은 전근대적 명예살인(Honor Killing) 케이스에 해당한다. 문명개화되었다는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이러한 ‘명예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도르 둘러쓴 아랍 국가뿐만이 아니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해마다 5,000건 이상의 명예살인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사건은 나사르가 과연 안젤라의 처녀성을 빼앗았느냐는 것이다. 모친의 매를 이기지 못한 안젤라가 내뱉은 단 한마디의 말만 있었을 뿐 나사르의 범죄, 혹은 모욕의 근거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으니 사건은 종결처리된 것이다. 마르께스의 매력은 그런 공범화된 의식을 메마른 문체로 풀어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무죄이며, 또한 모두가 유죄가 되어버린다.

죄 없는 사람들

  나사르가 죽은 이유는 한 여자의 처녀성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왜’는 필요하지 않다. 둘이 서로 사랑했는지 알 필요도 없다. 아니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법적/의학적’ 판단도 없다. 칼을 든 쌍둥이 형제도 실제 죽일 의사는 없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 당시, 그 사회의 평균적인,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 악을 응징할 필요가 있었고 그걸 떠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살인을 예고하고, 떠벌릴 경우의 일반적인 반응은? 당연히 제지하거나 신고하거나 그도 아니면 동참해야 했으리라. 이 마을 사람들의 경우는 사실 애매하다. 형제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충분히 밝혔으니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들을 제어해주길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른다. 집안의 망신을 응징하는 방식은 그걸로 족할지도 몰랐을 일이다. 물론 경찰서장이 칼을 압수하는 행동을 했지만 행동자체를 완벽하게 차단시키지는 못했다.

죄 있는 사람들

 동일한 이유로 모두들 유죄인 셈이다. 명예살인도 살인이며 그러한 사적복수의 일환인 살인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없는 다수, 행동하지 않은 다수는 당연히 공범인 셈이다. 살인방조죄인 셈이다. 나사르의 경우는? 그들의 사회적 규범으로 보아 유죄일수도 있을 것이다. 죽는 날 아침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그는 하녀의 어린 딸을 희롱했었다.  그러한 행동은 그의 평소의 성향이나 당시 그 사회의 남성적/사회적 지위의 우월감을 나타낼지도 모른다.

  소설제목은 <연대기>지만 소설이 연대기적으로 서술된 것은 아니다. 마르께스가 한때는 영화평론을 쓰고 영화감독을 지망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영화적 경향’을 잘 보여준 셈이다. 등장인물의 설명이나 살인의 과정, 그리고 그 살인의 동기는 조금씩 알려지고 그 부스러기를 통해 전체의 문맥과 의미를 이해하기 되니 말이다.

 첫날 밤 소박맞은 안젤라는 그 후 어찌 되었나. 뜻밖에도 안젤라는 매주 떠나가 버린 ‘산 로망’에게 편지를 부친다. 안젤라는 그를 사랑한다고 그런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 갑자기 그녀 앞에 등장한 산 로망. 산로망은 그동안 읽지도 않은 수백 통의 편지를 쏟아낸다. 뭘 의미하는가. 세월이 약인가. 기억이 독인가. 열린 결말을 요구하는 영화 같지 않은가.

내가 이 소설을 굳이 읽은 이유는 중국영화 <붉은 가마> 때문이다. 이소홍 감독의 <붉은 가마>의 원작/모티브가 바로 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환 2009-1-9)

http://en.wikipedia.org/wiki/Chronicle_of_a_Death_Foret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