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보이] (원작만화) 그게 그렇게도 부끄러웠니?

2008. 3. 11. 19:42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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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オールドボーイ] 글: 츠치야 가론(土屋ガロン) 그림: 미네키시 노부아키(嶺岸信明)

(박재환 2003.12.26.)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를 보고 싶었다. 개봉 훨씬 전부터 이 영화는 굉장한 언론플레이를 펼쳤다. 마당발 오동진 기자가 <시네버스> 편집장으로 있을 때 올드보이의 프로덕션 노트가 장기 연재되었었다. 그리고 개봉 전후로 각 TV(공중파, 케이블 포함하여)에서 끝도 없이 만두이야기와 복수이야기를 해 대며.. “왜 그랬을까요? 엄청난 반전을 극장에서 확인하세요.”라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세상에 내용은 이미 다 알고. 그 반전을 알기 위해 극장을 찾아가서. “아. 그랬구나.”하란 말인가? 만약 그 정도를 노렸다면, 그건 박찬욱 감독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어느 날 내 게시판에 누군가(어느 분인가) 올드보이 감상문을 기다린다고 했었다. 사실 [올드 보이] 엄청무지 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극장 갈 시간이 없어서… 주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어느새 이까지 와 버렸다. 게다가 [반지의 제왕3]이 개봉된 이상 [올드 보이]가 비디도로 나오기까지 정녕 볼 수 없단 말인가.

그러다가 어제 [올드 보이] 원작 만화를 먼저 보게 되었다. 난 영화 [올드 보이]의 마지막 반전이 뭔지 ‘아직도’ 모른다. 사무실 사람이 영화 보고와서는 내가 물어보니 저네끼리 “안 돼. 말하면 안 돼!”하면서.. “선배님, 메신저로 알려줄게요.”란다.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이 영화의 핵심요소는 ‘근친상간’이란다. 근친상간? 난 그럼, ‘최민식이 유지태를 어쩐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은 부자관계가 아니고, 아직은 한국의 많은 젊은 애들이 ‘아버지와 아들간의 근친 동성애’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채명량의 ‘구멍’이란 영화를 보셨ㅎ는지..) 그럼, 뭘까? 나중에 극장가서 확인해야지.. 하면서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올드 보이]는 모두 8권짜리이다. 일본의 인기 추리만화가 츠치야 가론(土屋ガロン)이 글을 쓰고 미네키시 노부아키(嶺岸信明)가 그림을 담당한 [올드 보이](オールドボーイ)는 일본 후타바샤(雙葉社)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엔 거산플랜이란 출판사에서 97년 처음 나왔다. 이곳에서 나온 것은 절판되었고 최근 아산미디어에서 다시 나온 모양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만화를 보고, 평소 자신의 하드보일드 터치의 상상력에 앞서(?)가는 ‘반인륜의식’까지 더해져 ‘근친상간’적 걸작을 만들어낸 모양이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영화를 안 봤으니. 이것은 박재환의 최초의 만화리뷰이니 이해하시라!


영화는, 참 만화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와서 사설감옥에서 십년의 세월을 지낸 남자 ‘고지마’가 왜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어야했는지, 자신을 납치 수감한 놈을 찾아내어 복수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설감옥이란 일본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버블경제가 한창일 때 혹은 그 직후에 생긴 신종 범죄수법으로 범죄조직이 의뢰인의 부탁을 받아 꼴사나운 놈을 비밀스런 방에 가둬두는 ‘신종 연금 비즈니스’이다. 이 남자 ‘고지마’는 어느 날 갑자기 끌려온다. 그가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숨 쉬고, 팔굽혀펴기 운동을 하고, 때가 되면 넣어주는 중국집 만두를 먹고, 24시간 지겹도록 TV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10년이 지난 후, 이 남자는 들어올 떄 그러한 것처럼 갑자기 세상에 다시 던져진다. 그의 잃어버린 청춘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자신을 감금시킨 ‘상대’를 찾아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떻게? 그의 등 뒤에 자그마한 칩이 하나 박혀있었다. 그를 감금시킨 사람이 삽입한 위치추적기였다. 그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자신이 감금되었던 사설감옥을 찾아내고, 상대와 대결하게 된다.

과연 왜, 누가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사적 형벌을 내리고 또한 그 피해 남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가 누군지 알아내 보라!”고 게임을 즐길까. 그리고 직접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왜 내가 너에게 이러는지 너 자신의 과거를 돌아다 봐!”라고 강요할까. 고지마를 납치한 ‘카기누마’는 이런 말을 던져놓는다. “만약 너와 나의 과거를 떠올릴 수만 있다면 이 게임을 끝나고 승자는 죽는다!”고.

그러나 고지마는 이 남자의 얼굴은 모른다. 교통사고로 얼굴을 뜯어고쳤다는 설정이 나온다. 하지만, ‘카기누마’와의 어떠한 과거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 더듬어….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어느 순간까지 생각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때론 교활하여 잊고 싶은 것은 잊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영원히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남자는 이 남자와의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어 그걸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반면 카기누마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말이다. 만화를 보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하려면.. 일단 최면술사를 찾아가서 심층의 기억을, 혹은 악몽을 끄집어 내면 될텐데라고. 그런데 이 만화 후반부에는 최면과 역최면이라는 기상천외한 설정이 나온다. 결국, 온갖 소동 끝에 고지마가 떠올린 기억은 (나에겐)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학적 감수성이 엿보인다. 여린 마음에 일어난 사소한 일들이 평생을 옭아매는 복수극로 나타난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의 기억 하나만 소개하겠다.

나는 현역으로 군대에 갔었다. 내가 복무한 군부대는 전라도 모 지방의 작은 군부대였다. 후방부대답게 현역은 10여 명 남짓, 나머지 100여 명은 모두 출퇴근하는 방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요즘은 방위가 뭔지, 당시 후방의 군대 규율이 어땠는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겠지만.. 쉽게 단순화시키면 이렇다. 현역은 굉장히 뛰어난 용사들이고 칼 같은 군기로 살아간다. 반면 방위는 군인도 아니고 사제인이라 군기가 빠질 대로 빠진 형편없는 조직이었다.- 국방부가 보면 기겁을 할 소리군!)

(1990년대 초였다는 것을 명심하시라!!!!!)

난 자대배치 받자마자 고참에게 받은 첫 교육이 방위애들에겐 무조건 ‘반말 해라’였다. 짠밥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뭐, 계산해보면 그럴 수도 있다. 난 24시간 짠밥 먹었지만 개네들은 하루 한 끼밖에 안 먹잖은가!) 그런데 방위들은 그런 대접에 일찍에 체념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쉽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에이, 더러운 것들. 참자. 얼른 6시만 되어라!”였겠지.

그런데, 군대도 인간사는 세상이다. 살다보니 친하게 지내는 방위도 생겨났다. 생각해보라. 현역이 얼마나 불쌍한가. 방위는 나를 위해 외부에서 책도 사다주고, 신문도 구해다주고, 사소한 심부름도 잘 해 주었다. 주말이 되면 읍내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다. 내가 현역에서 쫄다구 할 때… (그들 방위 무리 사이에서) 같이 고생하던 애가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최고참이 되어 있었다.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애가 방위 가운데 최고참이 되었으니 무척 편해졌다. 현역 숙소에선 제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었지만 방위 숙소에선 그냥 마구 뒹굴 수도 있었으니. 개네들 최고참과 아주 친하니 방위들도 나를 대대장급으로 받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이 생겼다. 그 최고참이 근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다이어리에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야, 뭐 하냐.” 하며 그것을 낚아채서는 읽어보았다. 그게 실수였다. (그 당시 방위 구성원은 서울대 다니던 놈도 있었고, 학벌이 무척 떨어지는 애도 있었다.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었지만..) 이 친구는 자신의 악필과 졸필과 맞춤법 틀린 것들이 들통 난 것에 대해 굉장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문학적’이기도 하다. 군대라는 사회. 프라이버시와 사적 감정의 문제 등등) 이 친구는 현역에 대해 그 어떠한 ‘하극상’적 반응을 보일 수 없었기에 그가 그 조직에서 최상위 인물이란 것을 이용하여 그의 조직원(방위)을 대상으로 닦달하고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방위 숙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부하들은 지옥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그 곳을 찾아갈 수가 없었고. 그 방위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나, 더 ‘문학, 아니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 동네는 조폭들의 동네였다. 그러니, 걔네들 사이엔 6시 땡하면.. 정말 “형님. 형님..”하는 분위기였던 곳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이름도 기억 못한다. 아마도.. [올드 보이]에서 국민학교 6학년 때 ‘고지마’와 ‘카기누마’ 사이에 있었던 어떤 일 – 그 수치스런, 혹은 폭발적 감수력에 대한 – 이 그 방위가 가졌을 것과 유사하리라 짐작할 뿐이다.

참, 만화에서 카기누마는 ‘고지마’를 납치하기 위해 3억 엔을 기꺼이 지불하고 10년의 공을 들인다. 복수의 무게가 그럴까?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 생각났다. 프랑스 작가 장 자크 패슈테르의 <표절>이란 작품이다. 혹시 관심 있음 구해 보시길.. (박재환 200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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