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라는 종교영화로 기억되는 세실 B.데밀 감독의 1947년 작품 <정복되지 않는 자>(Unconquered)는 미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보기에 꽤나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1763년, (지금은 펜실베니아주 피트스버그로 불리는 곳에 위치한) 군사요새(Fort Pitt)를 둘러싼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1763년에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아메리칸 신대륙이 ‘발견-개척’되면서 ‘무한’ 대륙에 대한 정복전쟁이 계속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이 끝나면서 적어도 이 지역은 영국의 확고한 식민지가 되었다. 이 지역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은 제각기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었는데 주로 프랑스 밑에서 싸웠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었던 인디언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영국(식민지 당국)은 인디언들에게 호조건을 제시하면서 프랑스 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인디언들이 예전부터 활동하던 오하이오 영역에서 자유롭게 사냥을 할 수 있으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지역에 백인 식민지 정착민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약속은 나중에 다 휴지조각이 된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식민지 정착민들이 인디언에게 약속한 땅으로 야금야금 파고들며 서부로 진출했으니 말이다. 인디언들은 또다시 총칼을 들고 영국(과 식민지정부)에 대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을 영화 <정복되지 않는 자>는 다루고 있다. 물론, 약속받은 땅에서 내몰린 인디언 시각에서가 아니라, 야만인 인디언으로부터 평화로운 백인을 안전을 지키려는 영웅적인 서구 시각이란 점을 미리 알아두기 바란다.
인디언과 싸우는 백인, 백인과 싸우는 백인
1763년 영국 런던의 법정. 애비게일(폴렛 고다르)이라는 여자가 살인죄로 교수형 선고를 받는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대륙에 계약노예로 팔려가는 것. 신대륙행 배에서 애비게일은 운명적으로 두 남자와 조우하게 된다. 한 사람은 마틴 갈스(하워드 다실바). 그는 오하이오 지역의 인디언들에게 무기를 공급(밀매)하는 백인이다. 그의 아내는 세네카 출신 인디언 ‘하나’이다. 갈스는 인디언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오하이오 일대를 독차지하려는 야심가이다. 또 한 남자는 갈스를 위험인물로 보고 있는 크리스 홀든(게리 쿠퍼). ‘백인여자노예’ 에비를 둘러싼 경매가 펼쳐지고 에비가 사악한 갈스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크리스는 기어코 거금을 던진다. 배가 노프크 항에 도착하자 크리스는 에비에게 “이제 당신은 자유의 몸이오.”라며 사라진다. 사악한 갈스는 그 매매계약서를 불태워버리고 자신이 에비를 구매했다며 에비를 차지한다. 한편 오하이오 일대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간다. 갈스가 공급하는 무기로 무장한 인디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세네카 추장 구야수타와 오타와 추장 폰티악, 그리고 델라웨어, 쇼니 등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갈스의 의도대로 백인 정착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픽스타운에서 열린 식민지 지도자 회의에서 크리스는 갈스의 야욕에 대해 폭로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크리스는 인디언과의 평화를 주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 와중에 에비는 인디언들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크리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에비를 탈출시키지만 피트 요새에서 재판을 받는다. 갈스가 정당하게 구매한 노예(에비)를 훔치고 탈영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이 언도된다. 결국 크리스는 마지막까지 에비를 지켜내고, 피트 요새로 접근하는 인디언의 공격을 물리친다.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영화 초반에서 만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은 ‘백인여성’노예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시 영국은 신대륙 미국을 개척하기 위해 많은 범죄자들을 계약노예(indentured servant)로 아메리카에 내보내었다. 우리로서는 다소 생소한 백인/여자 노예의 존재이다. 아비게일은 어쩔 수 없이 14년 계약노예에 서명하고 미국행 배에 오른다. 이들 계약노예는 (우리가 아는 흑인노예들처럼) 경매를 통해 백인주인에게 팔린다. 이들 백인들은 신대륙으로 먼저 건너와서 고생고생하며 땅을 개척하고 가정을 이루려는 자들이다. 에비게일 같은 계약노예는 이들 백인남자들의 하녀가 되든지, 결혼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노예 신분으로 말이다.
영화가 그리는 1763년의 미국의 지리적 영역은 정확히는 오늘날의 미국이 아니다. 동부 연안에 치우친 개척지이다. (서부는 아직 미개척의 ‘절대’ 황무지일 따름이다!) 당시 하나둘 식민지 주들이 형성된다. 13개의 주가 형성된다. 피크스타운에 모인 식민지지도자 중에는 나중에 미국이 건국되고 초대대통령이 되는 죠지 워싱턴도 있다. 피트 요새의 군사지도자인 시몬 에쿠어 대위도 실존인물이다. 보리스 칼오프가 연기하는 세네카족 추장 구야수타도 사실 꽤 유명한 인디언이다. 자신들 종족의 안위를 위해 때로는 프랑스, 때로는 영국, 그리고 나중엔 미국과 협력한 인물이다. (영화에선 미국에 맞서는 무식한 인디언으로 묘사될 따름이다)
이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지만 당시 피트 요새 공방전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이른바 ‘세균전 논란’이다. 1763년 6월 22일부터 인디언들이 피트 요새를 포위하고 대치전에 들어간다. 요새에서 전멸위기에 놓인 당시 영국군 지휘자 시몬 에쿠어는 요새에 들어온 두 명의 델라웨어 인디언에게 천연두(Smallpox)로 오염된 모포를 선물한다. 이런 비인도적인 세균전의 실제여부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시몬 대위가 천연두에 오염된 모포를 전달한 것이 독단적인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영국국 총사령관이었던 제프리 암허스트(Jeffery Amherst)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지. 그리고 전달받은 모포 때문에 인디언들이 천연두에 전염되었는지 등등. 위키피디아를 보면 시몬의 책략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또 다른 자료를 보면, 그 이듬해 인디언 부족에게 천연두가 광범위하게 창궐했다는 것도 있다. 물론 그 모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를 보고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1947년 당시 미국 영화팬들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영화에서 가장 경악스런 장면은 인디언들이 백인정착민을 학살했다는 잔혹함에 대한 설정이 아니다. 용감한 남자주인공 크리스(게리 쿠퍼)가 백인여자 에비가 인디언들에게 처형되기 직전 뛰어드는 장면이다. 인디언 용사들 사이에서 크리스는 에비를 빼돌리기기 위해 내놓은 책략은 이렇다.
“나는 용감하다. 인디언이 용감하다고 들었는데 여자를 죽이려하다니...”
“나는 당신들을 죽일 능력이 있다.”
“이 물건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내가 명령하면 이 물건은 저 나무로 화살을 돌릴 것이다.”
그러면서 내놓은 것은 ‘죠지 워싱턴에게서 선물 받은 나침반’이다. 나침반을 인디언 추장 손에 올려놓고는 (인디언 추장 몸에는 각종 쇠붙이 무기로 가득하다)
“내가 명령한다. 추장을 향해라!” 그러자 나침반이 (당연히 쇠붙이를 향한다) 인디언들은 혼비백산하여 이 백인남자가 대단한 신령이라도 되는지 백인여자를 데려가는 것을 바라만 본다.
물론, 과학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북쪽만 가리키는 나침반이 강한 자성의 쇠붙이를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침반을 처음 보는 ‘야만적’ 인디언을 농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네 번째 항해를 나섰다가 원주민에게 사로잡혔을 때 써먹었던 수법이다.(1504년 2월 29일 자메이카) 이 날 마치 월식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던 콜럼버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않으면 태양이 없어질 것”이라고 협박했고 원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그런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미국 건국신화를 찾다보면 용감한 영웅담보다는 순진한 인디언을 속여먹는 사기술에 실망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이다. (박재환 2010.8.11.)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톨스토이는 왜 객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가 (0) | 2010.12.08 |
---|---|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을 둘러싼 추악한 전쟁 (2) | 2010.11.09 |
[피라냐] 식인물고기 피라냐가 튀어나와요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 Piranha 3D, 2010) (0) | 2010.08.25 |
[피라냐2] 피라냐와 날치의 이종교배 호러물 (제임스 카메론 감독 Piranha Part Two: The Spawning 1981) (0) | 2010.08.24 |
[피라냐] 조 단테 감독의 B급 호러 (Piranha, 1978) (0) | 2010.08.23 |
[인셉션] 천재를 위한 바보 같은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Inception, 2010 ) (1) | 2010.07.14 |
[나잇 & 데이] ‘선남선녀’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 (0) | 2010.07.05 |
[대부] 어제의 클래식, 오늘의 콘텐츠 (0) | 2010.05.20 |
[로빈 후드] 왕, 봉건영주, 전쟁, 그리고, 화살꾼 (1) | 2010.05.13 |
[허트 로커] 이 군인, 미쳤다! (1) | 2010.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