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종말의 기억 (곽경택 감독, 2002)

2008. 2. 18. 21:23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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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2002/7/6) 영화 <챔피언>을 보고 글을 쓰려니 나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권투선수도 아니었고 영화인도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하면 된다’는 박정희 시절의 산업역군이셨다. 부산의 소문난 공단인 사상공단(부산시 사하구 학장동)의 꽤 규모가 큰 공장에서 책임자로 일하셨다. 6.25때 홀몸으로 부산으로 피난 와서는(그렇다고 이북출신은 아니고…) 자수성가 바로 문턱에서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아직도 살아계실 때 문화생활 혹은 여가활동이라곤 낚시 밖에 모르셨던 당신이 어느 날 공장에 영화촬영팀이 들러 영화를 찍어갔다고 한다. 나도 대학 1학년 때 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금형을 만드는 주물공장이었는데 종일 쇳덩이와 불과의 싸움을 벌이는 오염지대였다. 아버지는 영화촬영이란 것이 순전히 엉터리라고 하셨다. 커다란 망치로 종일 도끼로 나무 패듯 내리치는 장면만 종일 찍어갔다고 하셨다. 그 영화가 바로 김득구의 일생을 다룬 이혁수 감독의 <울지않는 호랑이>라는 영화였다. TV탤런트 이계인이 김득구 역을 맡았었다. 나는 그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챔피언을 보면서 김득구가 그렇게 막노동을 하는 ‘공장’장면이 나올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챔피언>에서 단 한 컷, 김득구가 권투를 배우기 위해 막일을 거듭할 때 공장에서 망치를 내리치는 장면이 있었다. 아마도 곽경택 감독은 <울지않는 호랑이>를 본 모양이다. 난, 김득구의 슬픈 인생을 보면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영화사이트 엔키노에서 <챔피언>을 다룬 기사의 제목이 <<누가 김득구를 죽였나>>이었다. 그리고, 젊은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으니 김득구라는 권투선수를 모르는 애가 많았고 그가 시합 도중 링 위에서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금시초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말고는 우리 아버지를 알 턱이 없고, 김득구의 유족 말고는 김득구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그리고, 난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김득구의 최후와 그 이후에 펼쳐졌을 ‘추잡스런’, 혹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를 통해 ‘후효현’만큼이나 비극적 현대사를 영화적 재미로 형상화시키는데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곽경택 감독의 솜씨를 한껏 기대하며 영화를 보았다.

곽경택 감독은 김득구의 비극적 일생을 유려하게 펼쳐나간다. 소년 득구는 강원도 바닷가 마을, 찢어지게 가난한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너 어디로 갈 생각인데?”라고 묻는 시골마을 버스안내양에게 하는 말은 “끝까지….”이다. 이 한 마디가 바로 헝그리 복서 김득구의 인생인 셈이다. 득구는 가난한 고향마을(강원도 어촌)을 떠나 무언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구 끝까지 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는 매혈(돈 몇 푼에 피를 뽑는다!)도 마다않고,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그 시절 터미널에서 볼 수 있었던 조잡한 책자를 파는 일도 마다않는다. 그러다가 권투에 입문하게 되고 자신의 가장 치열했던 삶의 후반부를 불사른다.

김득구는 거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밑바닥 생활을 했다. 껌팔이 소년에서부터 말이다. 굴다리 밑에서 새우잠을 자며 그는 불우한 자신의 환경을 저주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김득구가 <웃으면 복이와요>책을 들고 다니며 판다. <일간스포츠>에 따르면 당시 김득구는 이 책을 30원에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 권당 10원이 남고 그걸로 풀빵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권투였고, 권투는 짧게나마 그에게 ‘돈’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세계챔피언을 다수 배출한 김현치 코치의 ‘동아프로모션’에 들어가서 열심히 권투를 배운다. 그가 권투를 하는 것은 가난에 대한 저주와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김득구의 삶에 관심을 갖고 아침부터 도서관을 찾았다. 김득구가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러스 특설 링에서 쓰러진 것은 1982년 11월 15일이었다. 그날 전후의 <<일간스포츠>>을 찾아보았다. 당시 스포츠신문은 <일간스포츠> 하나 뿐이이었다. 두번째 스포츠신문인 <스포츠서울>은 85년 6월에 창간되었다.

성실함과 헝거리정신으로 한국챔피언-동양태평양챔피언이 되고 마침내 WBA 라이트급 챔피언에 도전한다. 당시 챔피언은 레이 맨시니. 당시 맨시니는 2차 방어전이었다. 맨시니의 통산전적은 24승(19KO) 1패. 19KO승 가운데 3라운드 이전에 승부를 가린 것이 15게임이나 될만큼 무쇠주먹을 자랑했었다. (게다가 1라운드 KO승이 8번이었다!) 김득구는 17승(8KO) 1무1패. 당시 도박사들은 맨시니의 낙승을 예상했었다. 김득구는 11월 3일 LA에 도착하여 현지적응 훈련을 했다. 김득구는 자신의 호텔 방에 혈서 격문 7~8개를 써 붙였다고 한다. ‘死生決鬪’,‘맨시니! 너를 죽인다’, ‘괴로움은 순간이나 영광은 영원하다’ 같은 섬뜩한 격문을. 운명의 1982년 11월 15일.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는 1만 명 수용의 특설 링이 만들어진다. 입장료는 15, 25, 50,55,100달러 짜리가 있었다. 대전료는 맨시니가 25만 달러(당시 환율 1억 8천 7백 50만원), 김득구가 2만 달러(1천 5백만원)였다. 김득구와 맨시니는 경기 시작하자마자 보기 드문 난타전을 벌였다. 14회 맨시니의 안면 라이트훅을 맞은 김득구는 휘청했다. 공식적으로는 14라운드 19초에 KO패 당한 것이다. 김득구는 의식을 잃은 지 99시간 19분만인 17일 하오 5시 55분(한국시간 18일 상오 10시 55분) 라스베가스 스프링즈 병원에서 끝내 숨졌다.

그 이후? 신문기사에 따르면 김득구는 그 전 해 동방생명에 1백만 원짜리 무지개보험에 가입, 최고 1천 만원까지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82년 당시, 일간스포츠 1부 가격은 130원이었다. 지금은 600원이다.) 김득구가 사경을 헤매자 대한항공은 김덕구 어머니의 미국행 항공권을 무료 제공했고 어머니 양소선씨는 미국에서 코마 상태의 아들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는데 동의하였고, 사후 김득구의 신체장기는 두 명의 미국인에게 이식되었다.

곽경택 감독은 김득구의 일생을 이야기에 담으면서 인간적으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김득구의 죽음은 그 이후의 비극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득구의 이복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나타났고.. 보상금을 둘러싼 슬픈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득구의 어머니는 결국 아들이 죽은 한 달 후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곽경택 감독은 이 뒷이야기를 차마 영상에 담지 못한다. 아니 찍기는 했지만 최종편집에서 빼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김득구의 애인. 둘은 교회에서 목사님의 축복 속에서 약혼식을 올린다. 챔피언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김득구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그 약혼녀와 그 여자의 배 속에 있었던 아이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도 궁금하지만 더 이상 파헤치는 것은 김득구의 비극적 인생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 같기에 추적을 포기했다. 다음달 여성지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나올지 모른다.

곽경택 감독은 김득구의 일생을 영화에 담기로 마음먹고서도 그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성공드라마도 아니면, 교훈적인 결과를 유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아무리 낭만적인 연애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비극적 종말을 향한 잠깐의 햇살에 머물고 만다는 것을.

김득구는 대한민국 개발독재시대, 전근대사회의 마지막 표상이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한국사회는 좀더 이성적인 사회로 발전하게된 것이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은 스포츠영화도 아니고, 인간드라마도 아니다. 어두웠던 한국현대사의 굴곡이 담겨있는 사회드라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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