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1998) 데이빗 크로넨버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신체는 해체되어 재조립 되어야할 대상인 모양이다. 아니면 원래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란 것이 그 정신구조의 나약함만큼이나 결함투성이 부분들로 얼기설기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형태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도 크로넨버그는 예외 없이 인체에 대한 보형물의 삽입과 지지대의 부착으로 절뚝대는 인간존재의 부조화한 측면을 이끌어내었다.
제임스 스페이드와 데보라 웅거는 부부는 아니다. 연인이다. 이들 연인은 상당히 파격적인 性생활을 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 데보라는 한 남자와 주차장에서, 제임스는 한 여자와 스튜디오 한 쪽에서 섹스에 탐닉한다. 그들은 그들의 성적 경험을 이야기하며 엑스타시 환타지를 교류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충격-우리가 생각하는 고통, 아픔, 나쁜 기억, 충돌 순간의 무서움 등-은 이내 성적 엑스타시로 전화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들이받은 차에 타고 있던 헬렌 헌터의 넋이 나간 교통사고 순간의 기억에서 유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내 이런 자동차 충돌에서 고통 대신 어떤 성적 환상을 갖게 되는 일단의 무리를 대하게 된다. '본'이란 인물이 그들의 선봉장. 그들은 밤 숲속의 공터에 모여 서로의 사고 경험과 서로의 성적 환상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제임스 딘은 포르쉐를 타고 내달리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지금 그것과 같은 포르쉐가 여기 있다. 자기가 직접 타고 달린다. 제임스 딘이 밟았을 그 속도를 만끽하며. 그리곤 꽝 충돌한다. 그 순간.... 자신은 제임스 딘이 되며, 포르쉐가 되면, 충돌의 올개즘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기말적 상상력은 1973년 출판된 제임스 발라드의 원작소설에서 나왔다. '메카니즘과 퍼킹한 포르노그라피'라고나 해야 할까. 크로넨버그는 ‘영화화가 절대 안 될 것’이란 이 소설을 '그' 답게 영화화했고, '그' 답게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미국 내 제작배급은 CNN의 테드 터너가 소유한 영화사가 맡았다. 터너씨에게 미안하게도 NC-17로 보답한 이 영화는 충돌의 'GORE'와 섹스와 '오르가즘"이 기묘하게 결합한다. 데보라 윙거의 뇌쇄적 모습은 스틸에서만 확인할 수 있지 영화에선 숨마저 멈추게 하는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킨다. 그것은 '본'의 일거수일투족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1996년 깐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너무나 유명한 "originality, daring, and audacity"때문이었다. 그해 그랑프리 후보군으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풍월, 선체이서 등이었고 결국 그랑프리는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이 선정되었다. 크로넨버그의 이 논란 많은 작품에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여한 것으로 보아 깐느는 그런대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곘다.
영화가 영화로만 끝나지 않고, 사회문화의 한 반영, 혹은 기계문명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경종, 근미래에 대한 뛰어난 예시력을 보여주었다.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파리에서의 교통사고사로 그러한 인식은 절정에 이른다.
이 영화는 앉은 자리에서 두 편을 나란히 보았다. 하나는 우리나라 비디오 출시작, 또 하나는 이른바 노컷 영화. 순전히 두 개를 같이 본 이유는 솔직히 말해 어디가 잘렸는가 하는 호기심이었고, 또 하나는 뭔가 이상한 장면이 있어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성애적 장면의 삭제는 조금 의외였다. 아마 작년에 출시된 비디오라서 그런 모양이다.
이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중요한 장면이 있다. 제임스 스페이드와 '본'이 자신들의 몸에 문신을 새긴다. '본'은 교통사고의 흉터에 기괴한 도형을 입히고, 제임스는 자동차 문양을 조그맣게 새겨넣는다. 그리고 그 둘은 곧 그 차안에서 키스와 함께 애무를 하기 시작하더니. 이 장면이 삭제되었는데, 바로 그 뒷 장면이 본이 이유 없이 제임스의 차를 들이 박고는 사라져버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제임스의 연인 캐서린이 자신의 고급 무개차를 살펴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그 자체의 측면을 심하게 들이받은 것이다. 본이 그랬단다. 왜 그랬을까?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의 이야기? 동성애와 이성애의 복잡한 사람의 종말? 에스컬레이터되어가는 엑스타시의 질주?
그리고, 곧 홀리 헌터와 아퀸트(본의 애인이며 역시 자동차사고로 온 몸에 보형물을 삽입한 여자)의 동성애 장면이 또 다시 폐차장의 차에서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NC-17이란 치명적 등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화감상문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으니, "그렇게 많은 섹스 씬이 있음에도, 그렇게 많이 덜 선정적인 것은 정말 드물 일이다..."라는 것이다.
제임스와 캐서린이 본의 차를 고가도로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다분히 살인의 의사가 내재해 있는 행위였음)장면과, 또한 캐서린마저 똑같이 고속도로에서 추돌시켜 전복시키는 장면에서는 혼란의 극치에 이른다. 이유가 무엇인가이다.
전반부에서는 줄곧 단순하게 제임스 딘의 죽음에 경도되어, 스피드 광, 혹은 자동차충돌 경험자(교통사고경험자)의 그 충격이 전해주는 엑스타시에 초점을 맞추려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덜 떨어진 속도광의 자해적 매조키스트 무비가 아님은 후반부의 그 미스테리한 심리에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본이 대표하는 것은 차체에 대한 경배보다는 부서지고, 찌부러진, 그래서 겨우 바퀴만이 붙어있어서 내달릴 수만 있으면 되는 최소한 존재가치로서의 차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서 그는 섹스하고, 생각하고, 죽는다. 그 게 다이다.
영화는 일종의 sexual fetish로서의 자동차를 다룬다. 기계문명 속에서 완전히 동화된 인간은 이제 그것의 통제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작동되어지는 매커닉 휴먼, 시스테믹 휴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기어를 넣고,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그들의 피부는 얇고, 뼈대 구조는 허약하며, 피는 너무나 새빨갛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친구와 연인을 희생하면서도 이루어내려는 욕망의 지꺼기가 폐차상태의 차체에서 뚝뚝 떨어지는 기름만큼 끈적거린다.
남자든, 여자든, 섹스파트너든, 연인이든.. 그들에겐 차와 충돌과 섹스, 부상, 그리고 무의미한 죽음에까지 그 어떠한 것에도 의식이 부재한다. 그들은 단지 존재하기에 그럴 뿐인 것이다. 이미 그들 몸에는 무수한 볼트 너트가 끼워져 있을 테니 말이다. (박재환 1998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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