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서] '다른 관점에서' (홍상수 감독 In another country, 2011)

2019. 9. 5. 15:00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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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 감독처럼 영화를 쉽게 만들고, 홍상수 감독영화처럼 어렵게 읽히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1996년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란 기묘한 제목의 데뷔작을 내놓았을 때 한국의 영화계는 막 새로운 물결이 넘실거리려고 할 찰나였다. 그 징후는 영화저널의 탄생이었다. 그 전 해에 주간지 <씨네21>과 지금은 사라진 월간지 <키노>가 잇달아 창간되면서 영화저널다운 영화저널이 영화팬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읽기가 재밌어지고 다양하지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김기덕 감독의 <악어>가 나란히 개봉되었고 영화저널을 통해 새로운 자양분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뒤 이제는 조선희 편집장이나 정성일 영화평론가 없이도 인터넷이란 열린 공간을 통해 넘치는 평자들이 홍상수 영화를 이리 재어보고 저리 분석하고 난리이다. 그런 호들갑에 상관없이 홍상수 감독은 여전히 배우들에게 당일치기 시나리오를 툭 던져놓고 영화를 찍으며 해마다 깐느행 비행기 표를 알아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다른 나라에서>는 제작 소식과 함께 깐느영화제 행이 예약되었다. 이자벨 위페르라는 프랑스 여배우도 등장하니 홍상수 영화로서는 제법 국제적 규모의 영화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전까지 ‘여관방’을 전전하는 수컷들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근사한 호텔 로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라도 될 듯싶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역시 홍상수 영화군”이라는 탄식을 하게 된다. 마치 영화를 꿈꾸는 소년이 캠코더(요즘은 아이폰)를 들고  습작을 마구 찍듯이 그는 카메라를 돌리고 그 렌즈 앞에 선 ‘잔뜩 긴장한’ 배우들에게 ‘자연스런’ 대사와 액션을 요청한다. 크게 돈 들 구석도 없는 그런 화면을 담아낸다. 대신 홍상수 감독은 스토리 전개에 나름 고심한다. 왜 저 배우가 저 곳에 있고, 왜 저 곳에서 저렇게 말을 하고, 저 장면에서 배우는 왜 뺨을 때리는지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스크린에 걸리고 나면 홍상수 감독 이상으로 평자들이 그 의미를 증폭시켜 해독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라스트 씬을 선사할까. 그리고, 우리의 부지런한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의미를 찾아낼까. 참, 기이한 감독의 신작이랄 수밖에 없도다!

 

프랑스 여자, 전라도 해안마을에 오다

 

이번 영화는 전라도 부안의 모항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의 한 펜션을 무대로 한다. 이 조용한 마을의 특별할 것 없는 작은 펜션에 윤여정과 정유미가 자리 잡는다. 빚에 쫓겨 내려와서 그 펜션을 운영한단다. 언제나처럼 배우들의 수다스런 대화를 통해 그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심한 영화과 학생 정유미는 심심풀이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펜션에 프랑스 여배우가 내려왔다면서. 역시 영화는 그렇게 진행된다. 잘 나가는 영화감독 권해효가 어느 영화제에서 알게 된 프랑스 감독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이곳에 내려온 것이다. 한국‘남자’감독은 술 마시면서 그 생각 ‘뿐’이다. 언젠가 둘이 나누었던 그 달콤한 키스를 한 번 더 해 보려고. 문제는 같이 내려온 권해효 감독의 와이프 문소리는 임신 중이고 배가 남산만 하다는 것. 이자벨 위페르는 그 모항 바닷가에서 수상안전요원 유준상을 만난다. 유쥰상은 짧은 영어로 이자벨을 자신의 텐트로 데려온다. 그리곤 뜬금없이 기타연주와 함께 영어노래를 들려준다. 이게 <다른나라에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이다. 홍상수 감독은 바로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에 사는 이자벨 위페르는 남편 몰래 바람을 핀다. 상대는 한국남자 문성근. 모항까지 몰래 내려와서 도둑 데이트를 할 요량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마침내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프랑스 여자로 등장한다. 이야기는 일관성이 없는 듯하지만 교묘하게 엮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의 완벽한 퍼즐이 될 필요는 애당초 그런 게 없는 스토리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홍상수 스타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펼치는 소극일 뿐이니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 홍상수의 영화 만들기는 자기의 주위에서 펼쳐지는 ‘찌질한’ 사람들의 화려한 외출 같다. 영화감독 같은 ‘먹물’들이 술 처먹고 여관을 배회하는 그런 궁상맞은 시추에이션 말이다. 홍상수 감독은 국내외의 크고 작은 영화제의 단골손님이다. 그런 영화제의 기억은 밤에 이어지는 화려한 파티의 잔상이거나 해운대 백사장에서 맞는 아침의 술기운 같은 동질감을 준다. 홍상수 감독처럼 많은 영화를 만들고 많은 영화제에 참석하다보면 수많은 영화인과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를 만났을 것이고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 날 문득 이런 시나리오가 생각났는지 모른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배우나, 한국남자나 외국여자나.... 하다못해 수상안전요원조차 음주의 진행과 만취의 최후는 비슷하다는 것이리라. 술 마시다 수많은 약속을 했을 것이고 그 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전날 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그런 상황들. 게다가 불쑥 “날 사랑한다면 몽블랑 만년필 기념품으로 나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깐느감독상 수상 트로피 나 주세요. 그럼 키스 해 드릴게요.”라는 대사를 유럽의 여배우에게서 들었는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다른 영화에 비해 런닝 타임이 짧다는 느낌이 유독 많이 든다. 몇 안 되는 등장인물과 얼마 안 되는 스토리라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밌다. 영화도 재밌지만, 이런 영화를 어떻게 복잡하게 해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특히 재밌다. 이 영화 보고 <강원도의 힘>을 보거나 <오! 수정>을 보시라. 그러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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