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요새의 세 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장작의 제왕’

2019. 7. 30. 09:31일본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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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2004/5/11) 지난달에 서울 시네마떼크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회고전】이 열렸다. 거장 중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중 [주정뱅이 천사], [들개],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숨은 요새의 세 악인[, [천국과 지옥] 등 모두 15편이 상영되었다. 낡은 비디오나 DVD로만 볼 수 있었던 이들 작품을 대형 스크린의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지만 이번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8년도 작품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일본어 제목은 ‘隱し砦の三惡人’이다. ‘요새’라고 하면 기병대가 등장하는 서부극이나 잔다르크가 활동하던 중세의 육중한 성탑과 성곽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일본 전국시대(서기 1500년경)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요새는 좀 다르다. 광활한 돌산 기슭에 숨은 듯 지어진 조그마한 움막집 같은 형태이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만나게 되는 산장 모양의 대피소 정도? 그럼 이 비밀요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전국시대란 1500년 경을 이른다. (일본史에 대한 것은 나도 사실 잘 모르니.. 열심히 역사책 찾아보시길….) 영화에는 세 개의 세력이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아키즈키(秋月) 가문과 야마나(山名) 가문, 그리고 하야카와(早川)이다. 방금 ‘아키즈키’ 세력은 야마나와의 전투에서 완패한다. 오직 16살 난 유키 공주(유하라 미사)와 몇몇 시종만이 살아남아 후대를 기약한다. 이제 이 어린 공주를 우호적인 곳으로 빼돌려야 한다. 공주를 호위하는 임무는 마카베 로쿠로타(미후네 토시로) 장군이 맡게 된다.


지금 어느 편인지 모르지만 전쟁에 끌려 왔다가 패전 당한 측의 졸병 둘이 분노와 저주, 낙담하여 서로 티격태격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스타워즈 에피소드4의 첫 장면- 사막에서 로봇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과 흡사!) 바로 ‘타헤이’와 ‘마타키시’이다. 그런데 이들은 곧 군사들의 창끝에 내몰려 무너진 성곽에 들어간다. 군졸들은 포로들에게 죽도록 땅바닥을 파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로 아키즈키 가문이 성안에 황금 200냥을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기회를 엿봐 탈출한다. 길을 가다 그들은 방을 보게 된다. 아키즈키 공주를 생포하면 금화 10냥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입맛을 다시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들이 험난한 돌산을 막 넘을 때 누군가를 만난다. 바로 ‘마카베’였다. 마카베는 이 어리숙한 두 사람을 이용하여 공주를 빼돌리기도 작전을 세운다. 마카베는 유키 공주의 신분을 속이고 그녀가 벙어리이며 금화 200냥을 나눠 줄 테니 ‘하야카와’까지 동행하자고 한다. 황금에 눈이 먼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게 된다. 그들은 야마나 측 군사의 검문검색을 피해 산 넘고 물 건너 탈출을 시도한다. 그 와중에 황금 밖에 모르는 두 사람은 어떻게든 내뺄 궁리를 하지만 번번이 마카베의 완력과 유키 공주의 수완에 놀아난다.

이 영화가 바로 이후에 죠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에 영감을 주었다는 아주아주 유명한 영화이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R2D2와 C3PO 로봇이 바로 이 영화의 두 불쌍한 백성(전쟁포로)이다. 그리고, 유키 공주는 확실히 레이아 공주이다. 마카베 장군은 제국군의 습격을 따돌리고 공주를 보호하는 한솔로일 것이다.

영화는 때로는 [반지의 제왕]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럴듯한 스펙터클을 가끔 선사하기도 한다. 두 포로가 탈출하는 계단 장면은 [전함 포춈킨]의 오뎃사 계단 장면 못지않은 장관을 보여준다. 또한 돌산을 넘어 국경을 탈출하는 장면은 [사운드 오브 뮤직]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아, 물론, 황금을 나무땔감 사이에 숨기고 운반하는 것은 ‘절대반지’를 운반하는 것과 같은 숭고함을 안겨준다.

물론, 이 영화는 일본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두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멸문지화를 맞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공주의 위상이나 무사의 명예 등에 대해서 ‘사무라이’가 뭔지도 모르는 다른 나라 영화팬이 이 영화를 오롯이 이해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러한 민족적 정체성 못지않게, 누구나 이해할만한 인간 심리에 관한 재미난 분석을 시도했다. 얼떨결에 공주를 에스코트, 혹은 따라나서는 두 백성은 그야말로 무지렁뱅이에 돈에 눈먼 이기주의자들이다. 둘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눈앞의 황금에 눈이 멀고, 코앞의 창에 겁을 먹는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을 때때로 농락하며 공주와 무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리곤 내놓은 것이 달랑 황금 한 냥이다. 두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라 황금의 무게보다는 목숨을 간직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다.

의외로 이 영화는 아주 재밌다. 여정 자체가 스릴을 느낄 수 있을 뿐더러 고비마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기지와 모략으로 위험을 타개하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준다.

그나저나 제목에서 말하는 세 명의 악인은 누굴까? 어수룩한 두 백성 타헤이와 마타키시, 그리고 마카베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겠지. 하지만 두 백성은 천성이 못 배우고 사는 게 각박해서 황금에 눈이 멀었을 뿐이지 ‘악인’이라고 재단하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순박하다 못해 측은할 정도인 이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나쁜 사람일 것이다. ‘마카베’는 공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기꺼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그 시절 그런 마인드의 무사에게 선악의 개념을 들이다 밀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다고 공주가 나쁜 사람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어린 나이에 국가재건의 중책을 띤 그녀에게 무슨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게다가 영화에선 때론 엄청난 인간애적 자비심도 베푸는데 말이다. 그럼 이 편에서 저편으로 넘어간(배신한) 무사를 두고 악인이라고 했을까?

그럼 결국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누굴 말하는가. 꼭 누구를 집어서 나쁜 놈이라고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보아도 살벌했던 그 시절의 순박한 양심들의 허둥지둥, 우왕좌왕 독립운동, 망명의 여정을 다룬 것이니 말이다. 제목에 현혹되지 말자. 어쨌든 이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작품 중에 재미로 따지자면 손꼽히는 작품이다. (박재환)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隠し砦の三悪人,Three Bad Men in a Hidden Fortress,1958]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토시로 미푸네, 우에하라 미사, 치아키 미노루, 후지와라 카마타리, 시무라 다케시 일본개봉: 1958/12/28 베니스영화제 은곰상

 

 

隠し砦の三悪人 - Wikipedia

 

ja.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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