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진] 芙蓉鎭, 고화(古華)
중국현대사에 있어서 ‘광기의 10년’이라고 일컫는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몇 편 소개되었었다. 장국영의 [패왕별희]도 문혁의 광기를 그린 영화였다. 한때는 문혁(文革)을 배경으로 한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소설도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를 끈 적이 있다. 하지만 문혁이란 광풍이 중국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지 이미 한 세대나 지났지만 국외자일 수밖에 없는 한국 사람에게는 문화대혁명이 그들 중국인에게 정확히 무슨 의미를 지녔고, 어떤 집단최면으로 10억이 홀렸는지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들다. 중국인 스스로도 그들의 기억 자체에서 잊어버리고 싶은 고통과 고난의 세월이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중국 문혁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 첫 번째 작품은 아마도 영화 <부용진>일 것이다. (우리나라엔 천안문사태이후, 1989년 여름에 개봉되었었다) 당시에는 생경한 중국‘대륙’영화였다. 사진(시에진) 감독의 영화 <부용진>에는 당시 중국 최고의 스타 유효경과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된 강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는 영화의 배경만큼이나 감독도, 배우도 낯선 인물들이었다. 영화 <부용진>의 원작소설은 1981년에 발표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88년에 서당(書堂)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먼저 소설의 줄거리..
부용진(芙蓉鎭)은 중국의 호남, 광동, 광서 세 개의 성(省)이 경계를 접하고 있는 산골마을이다.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산골마을에서 펼쳐지는 1960년대에서 20년의 이야기가 소설 <부용진>이다. 부용진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호옥음은 어릴 적 오빠같이 따르던 여만경 대신, 푸줏간을 하는 여계계와 결혼한다. 공산화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가난한 중국이지만 이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한다. 쌀묵(米豆腐)가게를 운영하는 이들 부부는 새벽까지 일어나 맷돌의 돌이 다 닳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뛰어난 미모에 싹싹한 수완까지 더해 호옥음의 가게는 읍내 장터에서 가장 유명한 점포가 된다. 그를 아끼는 식량사무소 곡연산(谷燕山) 주임은 싸라기를 헐값에 호옥음에게 갖다 주기도 한다. 이런 호옥음을 질시하는 국영상점의 여주임 이국향. 그리고 혁명의 찌꺼기를 위해서라면 갖은 설레발을 치던 왕추사. 호옥음이 열심히 모은 돈으로 새 집을 장만하여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잠깐. 호옥음에게 어느 날 광풍과도 같은 비극이 닥쳐온다. 이른바 ‘사청운동’이 벌어진다. 공산국가가 수립되고 지주계층이 일소되었다지만 여전히 부르주아지 사상이 국가를 위협한다는 모택동에 의해 사상, 조직, 정치, 경제 분야에서 ‘정치적 클린 캠페인’이 펼쳐진다. 호옥음의 쌀묵 가게는 직격탄을 맞는다. 그리고 곧 불어 닥친 광기의 문화대혁명.
겁 많은 남편 여계계는 자살하고 호옥음의 가게는 빼앗기고 ‘신(新)부농’이란 딱지가 붙어 계급의 적으로 암흑의 세월을 지내야한다. 호옥음과 함께 계급의 적 ‘골수 우파분자’의 딱지가 붙은 ‘진서전’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새벽마다 부용진의 전석 거리를 청소해야한다. 세월의 광기와 세파의 메마름 속에서 둘은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고 그러던 중 두 사람은 마침내 사람의 정을 느끼게 된다. 시대가, 사회가, 사람들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결혼식. 그 후과는 무섭다. 진서전은 감옥(교화소)로 끌려간다. 그 동안의 거듭된 광기의 역사를 몸소 겪은 진서전은 호옥음에게 소리친다. “살아야 해,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라고. 호옥음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혼자 아이를 낳다 죽을 고비를 맞을 때 그들을 측은히 여긴 곡연산이 감동스런 도움을 준다.
겨울이 깊어지면 봄이 오듯이 모택동이 죽고, 사인방이 체포되고, 중국은 다시 기지개를 펼친다. 광란의 10년이 끝나고 우파 딱지는 제거되고,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이른바 평반(平反). 억울하게 죽거나, 쫓겨났거나, 부당하게 호도당한 영혼들이 뒤늦게 ‘붉은 도장’과 함께 ‘신원(伸冤)’의 과정을 거쳐 정상을 되찾게 된다. 호옥음과 진서전은 살아서 만난다. 모든 게 정상이라고? 이국향 서기는 여전히 더욱 승진하고, 혁명의 단물만 빨아먹던 왕추사는 “혁명! 혁명! 갈아엎자”고 소리 지르며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중국현대사의 비극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장개석의 국민당 패거리를 물리치고는 천안문광장 높은 누각에서 위대한 농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선언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만방에 알린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황제와 가진 자에 의해 통치되던 10억 거대 공동체가 제자리를 잡기에는 역사의 시련이 만만찮다. 중국 건국 이후 곧바로 변방을 위협하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부터 몇 천만 명이 굶어죽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3년의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영도력에 대한 도전이 있었고 백화제방과 반우파투쟁, 사청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 정치투쟁이 끝없이 이어지며 죽고 죽이는 처절한 인민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그것은 천안문광장에서만, 자금성-아니 조어대 안에서만 이루어진 권력투쟁이 아니었다. 그 넓은 땅, 그 많은 중국인민들이 모두가 주연과 조연으로 나서야했고, 일상생활과 그들의 운명, 나아가 생명까지 위협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각자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을 버려야했고, 인정에 눈을 감아야했다. 그것이 그들의 집단 역사경험이며 공범의식이 되어 오랫동안 그들을 억누른 것이다.
[부용진] 문화대혁명의 금자탑
<부용진>의 작가 고화(古華,꾸화)의 본명은 나홍옥(羅鴻玉)이다. 1942년 호남성 가화현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지극히 전원적인 풍토 속에서 자랐다. 스물 살 남짓했을 때 문혁이 시작되었다. 그의 학교교육은 끝장났고 모든 것이 멈춰선 광란의 현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문혁이 끝난 뒤 그는 그가 직접 보고 경험한 산골마을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문혁기간에 어느 산골, 어느 동네에라도 있었던 그런 유형의 사람들인 것이다.
소설 <부용진>은 출판 후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문혁의 비극을 기억하는 중국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족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1982년 제1회 모순(茅盾,마오뚠)문학상 수상작이 된다. 마오둔 문학상은 중국의 초대 작가협회주석이었던 소설가 ‘모순’을 기린 중국의 유명문학상이다. ‘모순’은 자신이 죽기 얼마 전 자신의 원고료 25만 위안을 내놓으며 중국의 장편소설 작가를 기리는 문학상을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후 모순문학상은 중국 최고권위의 문학상이 된다.
남의 나라의 끔찍한 경험담을 다룬 문혁소설 <부용진>을 한가하게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부용진>은 그야말로 그들의 피눈물로 살가죽에 쓴 소설이 아닌가. <부용진>은 그런 소설이다.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이 소설은 이른바 상흔문학(傷痕文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문화대혁명의 비극에서 잉태된 상처받은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그 시절을 다룬 대표소설답게 등장인물은 전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아마도 국영음식점 여주임 이국향일 듯. 계급과 당성에 철저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정치바람에 민감한 이 여자는 평화롭던 부용진을 정치적 투쟁의 생지옥으로 이끈다. 하지만 기고만장하던 그녀도 북쪽에서 내려온 ‘정통’ 홍위병의 위세에 의해 모욕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또 그런 비극적 순간이 중국식 사고방식(새옹지마)에 의해 환경변화에 따른 지위상승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 그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결혼을 요청하는 진서전의 읍소에 대한 이국향의 히스테릭한 반응이다. “어이 철사 가져와. 이 부농의 여편네를 발가벗기고 젖꼭지에다가 철사를 박으라구!!” (문혁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과 정치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호옥음의 성적 매력과 불구일 수밖에 없는 당시 중국의 현실을 헤아려 봐야할 것 같다. 중국은 고대나 현재나 미모의 여자에 의해 역사가 좌우된다. 아니 역사가 흔들리는 그 순간에 언제나 그러한 존재가 있어왔다. 문혁을 앞둔 중국, 그 조그마한 산골마을에도 그러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호옥음이다. 공산혁명의 성공과 건국이라는 위대한 성과에 이어 ‘한솥밥’이 대표하는 하향평준화 되어가는 공산사회에서 호옥음의 부지런함과 바지런함, 돌출적 성공은 질시를 받고,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거나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도 같은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대부(大父)적인 존재인 곡연산이 그렇다. 이 남자는 항일전쟁시기, 국민당군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인민영웅이다. 아무도 모르는 단 하나의 비밀이라면 전쟁에서 폭발과 함께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 하지만 문혁의 광기는 그가 딸과 같은 존재인 호옥음과 불륜의 관계일 거라는 비난을 받아야했고 결국은 자신의 결백을 위해 수술대 위에 올라가 자신의 ‘비정상적 신체상황’을 까발려야하는 수모를 당했다. 거세당한 남성의 비극과 차단당한 여성의 매력이 문화대혁명을 관통하는 비정상 불구국가 중국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인간적 정욕은 여전하다. 모두가 숨죽은 듯 엎어져있던 그 암흑의 시기에도 국가의 촉망받는 여서기 이국향과 정말 인간쓰레기 같은 왕추사의 은밀한 정사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작가 고화의 고향은 호남(湖南,후난)성 가화(嘉禾)현이다. 중국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화현은 호남성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곳이라고. 그렇지만 이곳에 유전되는 민요가가 5천여 곡에 이를 만큼 ‘민요의 고향'(民歌之鄕)이라고 불린단다. 소설 <부용진>에서 진서전의 직업이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 민요를 채집하는 것인데 예사롭지 않다. 또한 가화현의 자랑은 이곳 출신의 작가 두 사람이다. 고화와 중국 인민군 영웅 소극(肖克) 장군이다. 소극의 <욕혈나소>(浴血羅霄)는 3회 마오뚠문학상 명예상을 수상했다. 중국의 그 많고 많은 현에서 오직 ‘가화현’만 두 사람의 마오뚠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고화는 이후 호남성 작가협회 주석을 거쳐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단다. (박재환 2008-12-1)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옌롄커) 그래서. 몸을 바쳤다... (0) | 2020.08.26 |
---|---|
[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휴먼 판타지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0) | 2020.03.30 |
[BOOK] 넷플릭소노믹스 "미디어생태계 대전" (유건식 한울아카데미,2019) (0) | 2019.09.16 |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발칙한 사랑의 당파싸움 (0) | 2019.08.18 |
[연성결] 김용의 강호잔혹사 連城訣] 김용(1963) (0) | 2019.08.18 |
[밤의 괴물] 스미노 요루의 이지메 탐구 (0) | 2019.08.12 |
[멀티플렉스 레볼루션] CGV극장전 (조성진 지음) (0) | 2019.08.12 |
[무지개를 기다리는 그녀] 인공지능과 드론이 만나다 (이스키 유 지음) (0) | 2019.08.10 |
[눈물] 쑤퉁이 새로 쓴 맹강녀 이야기 (쑤퉁/ 김은신 역 碧奴 문학동네 2007) (0) | 2019.08.09 |
[눈보라 체이스]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0) | 201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