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참으로 길고긴 하루를 경험할 때가 있다. 뜻밖의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집을 나와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오해하고, 싸우고, 얻어터지고, 울고불고, 끼니를 거르며 뛰어다니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서 엎어져서는 “이게 무슨 일인감?”하고 말이다. 보통 째깍거리는 시계침을 BMG로 하는 액션스릴러 장르의 영화가 이렇다.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 진이 다 빠질 만큼 피곤해진다. 그런데, 조성규 감독이 그리는 ‘긴 하루’는 어떨까. 분명 먹고, 마시고, 돌아다니느라 피곤해질 것이다. 그의 영화를 몇 편 봤다면 말이다.
오늘(30일) 개봉하는 영화 [긴 하루]는 조성규 감독 작품이다. 정확히 몇 번째 연출작인지는 모르겠다. 조성규는 영화제작, 배급, 시나리오, 감독 등 멀티형 영화인이다.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맘껏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히 홍상수 감독급이다. 이번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 ‘긴 하루’는 흥미로운 구조를 가진 영화이다. 네 편의 단편이 연결된 옴니버스이다. 앞 세 편은 서로 다른 배우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런데,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앞 세 편의 종합편이다.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큰 감나무가 있는 집’는 김동완과 남보라가 출연한다. 소설가 현수(김동완)는 글을 쓰기 위해 강릉의 한 조용한 집으로 이사 온다. 짐 정리를 하는데 윤주(남보라)가 와서는 “예전에 이곳에 살았었다. 뭔가 두고 온 게 있어 찾아봐도 되겠나?”라고 말한다. 두고온 게 무엇인지 집안 이 곳 저 곳을 둘러봐도 결국 찾지 못한다.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섭국과 물회, 그리고 소주를 시켜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 ‘기차가 지나가는 횟집’에는 영화를 만드는 현수(서준영)와 정윤(선민)이 등장하고, 세 번째 이야기 ‘바다가 보이는 작업실’에서는 1주일 전 아내 소영을 사로로 잃은 현수(김성제)가 아내가 생전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작업실을 찾았다가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근처를 헤매다가 월정사에서 카메라를 든 정윤(이다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네 번째 에피소드 ‘긴 하루’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말한 인물들의 사연, 삶, 이야기가 온전히 결합되어 펼쳐진다. 소설가 정윤(정연주)과 친구 윤주(신소율)가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셈이다. 누가, 누구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대강 조립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캐릭터 이름만으로는 영화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에피소드마다 각기 다른 배우들이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성규 감독은 의도적으로 멀티캐스팅으로 캐릭터를 연기시킨 듯하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혹은 각자의 사정으로 추억을 만들거나, 기억을 남긴다는 것이리라. 같은 공간에서 있지만 그들 각자의 기억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영화 ‘긴 하루’는 조성규 감독이 제일 잘 아는 영화판의 이야기와 제일 잘하는 음식 이야기를 버무려 완성시켰다. 이 영화에서도 배우들은 정말 열심히 먹는다. 혹시 강릉에 가게 되면, 이 영화에 나온 식당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감독이 돈이 많아서 영화를 많이 찍는 게 아니라, 그동안 영화를 제작하느라 빚이 많아, 최대한 영화를 많이 찍는다고 한다. 영화라는 것도 참 서글픈 노동의 현장인 셈이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사람이랑 술 마시고,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씩이라도 가슴에 남기는 것이 정말 ‘멋진 인생’ 아니겠는가. 이 영화 보고나면 드는 생각이다. ⓒ박재환 2021.12.30
▶긴 하루 ▶감독: 조성규 ▶출연:김동완 남보라 신소율 정연주 김혜나 김성제 이다혜 서준영 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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