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7. 15:31ㆍ미국영화리뷰
카미오란 말은 원래 다이아몬드 목걸이 같은 것의 가장자리에 박히는 보석이란다. 크기는 작지만 아주 반짝이는 존재란다. 그래서 영화에서 잠깐 얼굴만 비치는 감독이나 배우를 카미오 롤이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초반부에 존 트라볼타가 콧수염 기르고 전쟁을 독려하는 장군으로 잠깐 나온다. 그리고 후반부에선 죠지 클루니가 "전우는 가족과 같네 어쩌구.." 하고 (숀 팬이 듣고 있자니 X소리같은) 설교를 하는 역으로 나온다. 테렌스 말릭이 이 영화를 기획하고 있자, 헐리우드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얼굴 한번 들이밀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실제로 니콜라스 케이지는 출연하고 싶다고 핸드폰 전화번호까지 넘겼었는데 말릭 감독이 통화하려하니 이미 번호가 바뀐상태. 케이지는 바뀐 번호를 알려주지 않아서 감독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왜 이들 미국배우들이 이 감독 영화에 나오려고 했을까? 로버트 알트만처럼 헐리우드의 파워감독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두 편(황무지, 천국의 나날들) 그의 전작 영화의 영향이다. 그는 단 두 편만을 감독했었다. 그 두 편이 엄청나게 흥행성공했다거나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인정하기를 테렌스 말릭감독은 여타 감독과는 다른 영화에 대한 감각과 화면에 펼치는 마술같은 미적 능력, 그리고 독보적인 철학적 사유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한편의 미술 화첩처럼, 또는 한편의 철학 서적처럼 영화보는 사람에게 많은 감흥과 사색의 공간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데뷔작 <황무지>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이래 최고의 데뷔작으로 손꼽히고, 그의 두번째 작품 <천국의 나날들>을 70미리로 극장에서 본 사람은 영화사상 최고로 아름다운 화면을 본 관객으로 인정받고 있단다. 그런 감독이 20년 가까이 은둔생활에 가까운 칩거를 끝내고 만든다는 영화이니 많은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미지 업을 위해서라도 출연하고 싶어할만 했을 것이다.
영화는 몇 편의 이전 영화들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같은 전쟁영화의 명작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말릭 감독의 이 영화에서는 정말 의외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느껴야하는 고역이 있다. 그것은 상영시간이 너무 길어서라든가, 이야기의 진행방식이 등장인물의 과거회상씬이 시도때도 없이 끼여드는 형식 때문이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철학적 주제의식의 접근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 영화는 실제 1942년 콰다카날전투에 참여했다는 제임스 존스의 동명소설을 옮긴 것이다. 오하마 해변에서처럼 미군은 그 산속고지의 일본군 전투 진지를 함락하기 위해,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현실을 무시하는 작전사령부-닉 놀테로 대변되는 권력자의 야욕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단견이다) 그 누군가가 그 위치에 있더라도 - 그것은 마치 새로 부임한 중대장 조지 클루니의 말처럼 - 난 아버지고 상사는 엄마다. 이제 너네들을 이끌고 저 진지를 접수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모한 작전을 수행했어야 했을 것이다. 읽어보지 않은 이상 모르겠지만, 원작소설의 키 포인터는 그런 것이었단다. 죽음과 좌절, 분노와 동료애에 사로잡힌 미군은 진지 접수 후, 살아남은 일본군 포로들에게 잔혹한 보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플래툰>에서도 보아왔고, 많은 휴머니즘 영화에서 지켜본 것이다. 적어도 영화내내 진지 코앞에서 동료가 죽어가고, 자신의 팔 다리가 잘려나갈 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할 동안 관객들마저 그러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저 진지만 접수하면, 저 진지만 접수하면... 그 속에 그 어떠한 인간존재가 있던 죽여버리고 말 것이라고....
여기서 작가나 감독의 말하고자 하는 바 - 휴머니즘 -를 잡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죽어가는 자들- 처음에는 미군, 그리고, 점령 후의 일본군-은 그 대의명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이건 명령이야!"라는 말에 뛰쳐나가고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전쟁이란 것이 가지는 상위개념의 거창함들 - 예를 들어 세계의 평화, 인류의 평화 등으로 치장되는 거대한 파워게임, 세계정치사적인 틀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소모품 또는 장식물로 전락한 그들 死地의 용사들을 측은하게 여길 뿐이다. 하나,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게 있다면 그러한 시선을 적어도 공평하게나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죽어간 것은 그들 천황의 대동아공영의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힌 전쟁광들의 희생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에서의 그 황국신민들의 야욕이었지 콰다카날의 일본군의 야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선 천황의 그림자도, 도조같은 전쟁광도, 가미가제의 미치광이 군국주의자도, 하라끼리의 사무라이도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있다면 전혀 뜻밖에 죽음앞에서 가부좌로 참선하는 동양의 신비로운 죽음의 광경일 뿐이다. 이점은 이 영화에서 일본군의 위치를 폭력적, 가학적, 가해자적 위치에서 단지 하나의 똑같은 피해자로서의 군인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일본군은 단 한 장면에서도 여태 보아온 그러한 괴상망측하고 비인간적인(서구인의 관점에서) 군인상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도 똑같지 공포감을 느끼고, 살고 싶어하고, 미쳐가는 그러한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미군측의 장대한 화력구도에서 느낄수 있는, 상대적 강자에 무릎꿇고말 한 미약한 존재로서의 적군이라는 사실을 담보할 뿐이다.
자, 그럼 감독이, 아니 제임스 존스가 찾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사실에 수렴된다. 삶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단지 사지에 내던져진 용사들은 살기위해서 - 처음엔 자신들의 삶이었고, 나중엔 전우를 위한 삶이 되고 그것은 결국 자기네들 국가의 영광으로 체현되는 그러한 장대한 희생과 죽음의 게임인 것이다. 고개를 들고, 뛰쳐나가면 조국에는 영광을 자신에겐 한 순간에 죽음을 안겨주는 사지에선 그들은 짧고 가늘게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작가가 말한 "씬 레드 라인(가늘고 붉은선)"인 것이다. 이 '가늘고 붉은 선'의 한쪽은 천국이며 정상적인 사고체제와 평안함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 선을 밟고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곳은 이른바 불바다 지옥이며, 누군가를 죽여야하는 전장터이며, 비정상의 세상인 것이다. 그 경계는 너무나 thin-얇다.
영화에서는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삶을 뱉어낸다. 그중에 가장 영화적인 알맹이가 있는 것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사실 죽음과 철학이 점철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역은 모두 천 가지의 사연과 만 가지의 운명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한 개별적 과거와 현재적 욕망을 묻어둔 채 조국의 영광과 군사적 승리를 위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숀 팬이 연기하는 방관자적 상사, 닉 놀테의 미친 듯한 지휘관 이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만들어낸 하나의 전형들인 것이다.
테렌스 말릭의 <천국의 나날들>를 보는 또하나의 감상방법은 주제나 이야기 진행이 아니라 단지 화면에 내비치는 자연의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그러한 뜻밖의 카메라워킹을 감상하게 된다. 한참 치열한 전투과정에서 비춰주는 푸른 하늘과 드높이 쭉쭉뻗은 열대삼림. 그 속에서 인간들이 죽어갈때 말뚱말뚱 지켜보는 원시 삼림의 생물들-도마뱀, 새, 뱀 들. 특히 진지전에서 보여주는 산등성이의 고요함은 인간의 처절함에 대비하여 평온함과 안식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장면이 해질녘에 촬영된 것이라서 더더욱 예술적이며 인생황혼의 무게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와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구하기>는 확실히 다른 영화이다. 테렌스 말릭은 하버드 철학과 출신으로 독일에 있을동안 하버마스의 인식철학론 책을 영어로 번역까지했을 정도의 철학도였다. 영화계에 들어와서는 단지 두편만을 완성했을 뿐이다. 그것도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형편없는 흥행실적이었고 말이다. 그동안 그는 영화 몇편을 생각했었지만, 좌절했고, 이번 영화를 우여곡절끝에 20세기 폭스사에서 만들어내었다. "17년만에 만드는 영화에요. 이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또 17년을 기다릴순 없잖아요." 그것이 이 영화 완성의 辯이었다.
닉 놀테는 이 영화로가 아니라 <어플릭션>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난 이 배우의 아주 오래전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과 야망 (Richman,Poorman)>의 톰 조다쉬라는 배역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드라마는 정말 멋있는 영화였었다. 그 불량학생이 이제 이만큼 컸다. 물론 그가 나왔던 몇몇 영화에서 이미 그의 매력을 느낄순 있었지만 말이다. 음악은 한스 짐머다. 굉장하다.
콰다카날에서 죽어가는 일본군속에는 어쩜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계셨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일본군도 아니었고, 천황의 종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군은 그것을 몰랐을 것이고, 오늘날 한국의 못난 후손들도 그러한 사실은 까맣게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박재환 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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