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정사는 미친 짓이다 (파트리스 쉐로 감독 Intimacy, 2001)

2019. 8. 3. 09:03유럽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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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환 2003년 11월 2일] <정사>라는 직관적 이미지를 내세우고 개봉된 영화 ‘Intimacy’는 2년 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화제를 뿌린 작품이다. 전체 상영시간 119분 가운데 무려 35분을 차지하는 섹스장면의 표현수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NC-17등급으로 개봉되었고 영국에선 논란 끝에 무삭제로 개봉되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재작년(2001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소개되었다. ….. 이 영화는 베를린 최고상에 해당하는 금곰상과 최고연기상에 해당하는 은곰상을 수상했다. <여왕 마고>의 파트리스 세로 감독이 주로 영국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런던에서 영어로 찍은 작품이다.

여기는 영국 런던이란다. 그곳이 런던인지 북유럽의 어느 도시인지도 모를 만큼 개성 없는 우중충한 현대의 한 도시에 사는 외로운 남자와 고독한 여자의 삶에 찌든 불쌍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남자가 자신의 집 문을 연다. 중년의 여인이 서 있다. “아, 오늘인가?”라면서 그 둘은 곧 섹스에 탐닉한다. 그렇게 무미건조하면서도 격정적인 섹스를 끝낸 후 여자는 총총 사라지고 남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 남자는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서 바텐더 생활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 ‘제이(마크 라일런스)’이다. 그는 바에서 신참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주고 언제나 돈을 꿔달라고 질질 짜는 친구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1주일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곤 또 다시 ‘수요일 오후 2시’ 무렵이 되면 그 여인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고 둘은 또다시 무미건조하면서 격정적인 섹스를 나눈다. 그런 어느 날 제이는 과연 자신과 이런 암묵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그 여자의 뒤를 밟기 시작한다.

서로의 정체에 대해 일절 묻지 않고 오직 육체적 관계만을 유지하다가 문득 그 여자에 대해 진지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감정’에선 훨씬 앞선다는 그 여자의 입장에서 이 남자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이들의 ‘정사는 미친 짓인가?’

베르나르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와 같은 맹목적+돌발적 섹스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사랑이야기는 최근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에서 지독한 현대인의 자기정체성 이야기까지 전진했다. 그리고 <정사>에선 더욱 고독하고, 더욱 현실적인 관계 정립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남자는 끊임없이 삽입되어 반복되는 자신의 과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그런 현실적 정체감을 어루만져 주는 여자의 존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여자의 입장에선? 여자는 유부녀이며, 연극무대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정열을 가진 자이다. 남편과의 관계-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는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터져 버릴 만큼 위태로운 갈등이 깔려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이 여자가 갖고 있는 연기에 대한 열정과 실제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 여자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을 모두 ‘수요일 오후 2시의 정사’를 통해 풀려고 할지도 모른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각 말할 수 없을 만큼 지지리로 처량한 현실의 굴레에서 탈출을 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의 남녀의 만남은 오직 암묵적 섹스로만 유지될 것이고 그 단계를 뛰어넘는 이야기는 결국 한 쌍의 남자와 여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잡한 사회적 갈등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마도 고독한 현대인의 사랑, 혹은 자신의 규칙적인 세상을 뒤엎는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갈등의 요인이 점점 높아지더라도 결코 그것이 육체적 폭력이나 절망적 사태(너 죽고 나 죽자 식의…)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고독은 타인의 등장이나, 자신의 포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때문일까?

참고로, 이 영화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른바 ‘보카시 처리’되어 국내 극장에서 개봉되니 야한 장면만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 영화는 상당히 수준 높은 – 꽤나 지루하다는 말임 – 어른들의 이야기라는 점만 알아두기 바란다. (박재환 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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