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미션' 임파서블 (박광수 감독, 1999)

2013. 1. 3. 11:11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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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직전의 아시아 실정을 보자. 영국과 프랑스 등 이른바 서구제국들이 아시아 국가를 침략, 수탈해가기 시작할 때 중국의 민초들은 청 제국의 수탈과 외세의 강점에 자생적으로 봉기하였다. ‘의화단의 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역사에서 일정한 시기에 항상 등장하는 민간신앙의 화신이었다. 백련교도의 난 같은 것은 중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면, '홍건적'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런 메시아적 상징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절 조선은? 그리고 조선의 변방 제주도는? 제주도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이 꾸준히 제주도에 눈을 돌렸을 것이고, 이제 박광수 감독이 까마귀가 되어 조감하게 되는 것인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제주도라는 것이 그 후 반백 년 뒤에 있었던 4.3사건과 연계되어, 제주도라는 섬마을로 한정되는 특이성과 폐쇄성, 그리고 숨겨진 혹은 망각된 순간을 되살리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면 1차적으로 느끼게 되는 언어의 상이함 때문일 수도 있고, 영웅의 부재에 기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재수는 결코 영웅도 아니고, 용사도 아니며, 연인도 아니다. 어정쩡한 역사의 현장에 어쩔 수 없이 내세워지는, 그러한 존재였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원래 영웅사관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오합지졸을 정예부대로 만들 사람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의 풍정처럼,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코 그들이 아닌 것이다. 바로 외부에 있는 세력인 것이다. 그것이 프랑스든 일본이든 외세이고, 믿을 수 없지만 매달려야하는 조선정부였던 것이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보면 주인공 신부님이 1910~30년대쯤 되는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제국의 선교 형태를 잠깐 보면, 각 종파들의 세력 확대를 위해 일단 신도 수를 중시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중국인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철저히 수탈되었고, 가진 것이라곤 눈치와 배고픔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하느님의 따뜻한 품’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몰려든다. 그들이 "할렐루야", "성모 마리아여.."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먹을 것이 생기고, 입을 것이 생기니 무엇을 마다하리오. 그러니, 저 멀리 바티칸의 교황청에선 나날이 늘어만 나는 교세 확장에 싱글벙글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새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잠자리까지 제공한단다. 이제는 그곳으로 몰려가는 식이다. 주인공 신부님은 이런 것은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이 1901년의 제주도를 이해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이다. 고종은 제주도에 칙령을 내려 천주교 신부를 마치 자신을 대하듯 하라고(如我待) 이른다. 그러니 어중이 떠중이, 못된 패거리까지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설쳐댄다. 그리고 봉세관(세금 거두는 사람)의 앞잡이가 되어 제주도 민중의 원한을 사는 것이다. 영화 시작할 때 사악한 천주교 교인에게 수모를 당한 할아버지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이 장면부터, 관객은 이 영화의 복잡한 사회구도를 인식해야하는 숙제를 짊어진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그러한 모든 사회적 계급과 천주교의 의미, 제주도 사회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략과 절제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시나리오도 애매하고, 연출도 부족하다. 관객에게 폭넓은 심미안을 강요하는 것만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주도의 형상을 구현시킬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문화제국주의’ 헐리우드의 울트라 블록버스트 <스타워즈>와 같은 날 개봉되었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유명해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투박한 제주도 말이 관객을 낯설게 하는 가운데 관객은 박광수 감독의 이 야심작에 조금씩 몰입하게 된다. 
 
일개 통인이었던 이재수가 조금씩 각 세력의 실상을 이해하고 점점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이 스타 이정재를 용의주도하게 활용하여 장구한 역사 속에 티끌 같은 민초의 실상을 그려낸다. 어차피 시대가 그렇고 사정이 그러하니, 이재수가 난의 중심 인물이 될 수도 없었고, 그러한 민중봉기에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창의(倡義)라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란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세 가지 시선을 유지시키려고 한 감독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이재수가 바라다본 제주도, 명계남이 지켜보는 현실, 그리고 까마귀의 시선이 주는 선지자적인 의미. 물론 그것은 모두 실패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32억이나 투자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100분이라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무엇을 집어넣으려 했는지 우선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사건 자체가 하나의 삽화, 혹은 묻혀버릴 야사적 성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700명이나 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결코 장대하게,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단지 박광수라는 타이틀에 압도되어, 제주도의 민중봉기라는 무게에 짓눌러 영화의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영화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영화 중의 하나인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감독 박광수의 분발을 정말 기대한다. 이런 소리 하기엔 아무 것도 아닌 박재환이지만 말이다.
 
박광수는 제주역사드라마에 호기롭게 달려들었고, 야심차게 영상에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그해 죽어간 사람의 영혼만큼이나 의미 없고, 한불합작이란 미명하에 이루어진 엄청난 영화적 실수였음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이재수의 난이란 것은 그 역사적 사실도, 그 영화도 결국은 까마귀만큼이나 중요하게 설정되었지만, 그 까마귀의 날갯짓만큼 허무하게 묻혀버릴 '미션 임파서블'인 것이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은 실존인물 이재수가 1900년 제주도에서 일으킨 민중항쟁 신축민란의 이야기를 다룬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가 원작이다.(박재환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