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선 (배창호 감독,2001년)

2013. 1. 3. 09:23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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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선] 멜로로 치장한 6·25비극

 

 

 

[박재환 2001/11/10]  이번(2001년) 제 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어떤 작품이 선정될 것인가는 사실 영화팬에게는 관심거리였을 수도 있다. 부산영상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후반작업 지연으로 탈락하면서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이 개막작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1980년대 충무로에서의 배창호 감독의 활약상과 그의 최근작 <정>으로 보건대 부산영화제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일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개막작품 자체가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제영화제들이 개막작품과 폐막작품을 그 영화제의 위상과 혹은 국제적 마케팅의 일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팬이라며 <오! 수정>과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음을 기억하며 관계자들은 그러한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던 <레슬러>는 영화팬을 사로잡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다. 제 아무리 베니스 감독상 수상작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부산영화제가 국제적 명성이냐, 아니면 다양한 영화세상을 구경조차 못하는 한국영화팬, 특히 변방의 지방 영화팬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대중영화제로서의 위상이냐가 한번쯤 심각하게 논의되었으리라. 그래서 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겸비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배창호의 <흑수선>을 개막작으로 선정했으리라.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는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서 “아니올시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배창호 감독의 대중작품 컴백에 크나큰 당혹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흑수선>의 원작은 김성종씨의 <최후의 증인>이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부산 사람이라면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태 그 사람이 부산사람인줄 알았는데 홈페이지의 프로필을 보니 전남 구례출신으로 나와 있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가면 <<추리 문학관>>이라는 분위기 좋은 북 카페가 있다. 바로 ‘부악문원’이 이문열의 문학의 산실이라면 이곳이 김성종 문학의 요람인 것이다. 작가 김성종씨는 모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수많은 작품들을 신문연재 형태로 발표했다. TV드라마로 아주 유명해진 <여명의 눈동자>, <제 5열>, 그리고 나의 기억으로는 오래 전 부산의 한 일간지에 연재하던 <백색인간>이란 작품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 신문에 연재된 <백색인간>에 탐닉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성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명의 눈동자>가 대변하듯이 드라마틱한 현대사의 격동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독자의 흥미를 붙들어 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꾼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증인> 원작소설에는 전형적인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에 덧붙여 보물지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빨치산 공비 유격대와 국군 토벌대, 그리고 그 와중에 지순한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지혜'와 '황바우'의 이야기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전쟁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적인 무대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낸다.

 

 

배창호 감독은 이 소설의 전체적인 플롯은 그대로 유지시킨다. 여자 주인공 지혜(이미연)는 남로당 간첩이다. 그녀는 거제도 수용소의 빨갱이들을 도와 탈출을 돕는다. 그들은 학교 건물 지하에 숨어 지내면서 섬 밖으로의 탈출을 노린다. 그 와중에 지혜를 겁탈하려는 놈들이 있고,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내분이 일어난다. 우직한 황바우의 희생으로 이들은 살아남게 되고, 그 더럽고 치사한 놈들의 50년 후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전향을 거부하고 50년 옥살이를 한 황바우(안성기)의 출옥과 함께, 어느 날 한강에서 변사체가 발견되고 유능한 강력계형사 이정재는 살인사건의 근원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였음을 알아낸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한국전쟁이라는 슬픈 역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의 슬픔을 그리고 싶었다"는 배창호 감독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민족'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빨치산 투사들의 빈약한 혁명의식은 실제로 이 시대를 다루었던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만큼 형편없는 쓰레기로 치부된다. (물론,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었긴 하다만..) 게다가 계급의식을 이야기하자면, 지주의 딸과 우직한 머슴의 아들인 황바우의 이야기는 전체영화를 이끌어가는 요소이지만 영화를 전체적로 배창호식 멜로물로 전략시키고 만다.

게다가 김성종 소설의 최고의 묘미가 되는 미스터리함에 있어서는 굉장히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연쇄살인범은? 사건의 배후는? 원수의 최후는? 여자의 정체는? 등등 잔뜩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관객들의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라스트 씬은 서울역 건물에서 촬영되었다. 이 장면은 명백히 <쉬리>의 잠실운동장 장면에 맞먹는 영화적인 힘과 관객의 감정이입이 필요하지만 안성기와 이미연이라는 당대 최고의 연기자들이 펼치는 라스트 씬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동대신 텔레비전 멜로드라마, 신파극 수준을 노정시키고 만다.

 

돌이켜보면 배창호는 한국적 소재의영화로 한국적 정서를 이끌어내는데 주력한 영화감독이다. 전작 <정>이 만들어놓은 감성적 깊이와 소재의 폭을 포기하고, 대중적 블록버스트의 장으로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쉬리>보다 못하고, <공동경비구역>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범작이 되고 말았다. 아쉬워도 한참이나 아쉬운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사실감 결여는 심각하다. 50년의 풍상이 전혀 베어나지 않는 연기자의 분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굉장히 기대를 가졌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묘사는 호탕한 한 번의 탈출극으로 끝이다. 그 장면은 멋있긴 하다만 <쉬리>에서 보았던 스타일이다.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는 배창호 감독에겐 미안한 말씀이지만 이명세 감독을 떠올리게 하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건질 것이 있다면 이정재라는 배우의 폭넓은 연기라고나 할까. 아쉽다.

 

그 당시, 그 동네의 비극적 이야기를 소설로 읽고 싶다면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의 일독을 권한다. 물론, 허영만의 <오 한강>도 탁월하고 말이다. (박재환 200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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