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 화양연화 속편, 아비정전 외전

2008. 2. 15. 06:14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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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d by 박재환 2004-10-11] 왕가위 감독의 신작 [2046]을 보면 윤후명의 [약속 없는 세대]란 소설이 생각난다. 기라성 같은 중화권 톱 스타들을 데리고 5년 동안 온갖 화제를 양산하며 겨우겨우 완성한 작품 [2046]은 왕가위 팬에게는 곤혹스런 작품이다. 남녀의 격정적 감정이 [화양연화]보다 더 나아간 것도 아니며, [아비정전]만큼 가슴 저미는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언뜻 보아도 이 영화에 관계된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온갖 고통이 용해된 것 같은 처연함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는 '2046년'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SF는 절대 아니다. 이 영화의 주된 정서는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와 동시대인 1960년대의 암울한 홍콩의 뒷골목이다. 유덕화가, 그리고 장국영이 이국의 어느 하늘 아래서 비참하게 죽어가던 그런 '비정시대'인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든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같았던 [화양연화]도 결국 신문사 글쟁이 중년 남자의 외도를 다룬 통속극이었다. 그 영화에선 '품격'이나 '절제'라도 있었지만 [2046]에선 지극히 비열한 한 화화공자(花花公子, 플레이보이라는 말보다 중국어가 차라리 어감이 낫다!) 양조위의 지루하고도 답답한, 불쌍한 '걸 헌팅'만이 이어질 뿐이다.

1960년대 당시 홍콩 신문사 글쟁이들은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쓸데없는 글을 남발한다. 격조높은 신문 컬럼이 아니라 '포르노'에서 '무협'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글을 쥐어짜서 그 당시 그 수준의 홍콩 신문독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다. 가진 것은 번지르르한 말재주 밖에 없는 콧수염의 사나이 차오 선생(양조의)은 '불쌍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유부녀 장만옥을 짝사랑했다가 심적 충격을 받고 싱가포르에 도망갔을 위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장국영이나 유덕화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공리에게 빌붙어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동방호텔 '2047'호에 머물며 잡문으로 연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사랑(아마도 아비정전의 장국영)을 잊지 못하는 유가령이 있고, 그런 유가령을 짝사랑하는 '장학우 같은' 장진이 있다. 둘은 아마도 룸 '2046'호에서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비극적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옆방에 머물고 있는 양조위에게는 이런 여자, 저런 여자가 끊임없이 오고 간다. 호텔 주인의 큰딸 왕비는 일본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둘째 딸 동결은 철없이 양조위에게 꼬리친다. 왕비가 사랑하는 일본사람이 키무라 타쿠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날 2046호에 들어온 장쯔이의 직업도 그렇고 그런 여자이다. (야총회(夜總會) 무희이다) 양조위와 장쯔이는 서로에게 돈(화대)을 지불하는 관계로 시작되었다가 어느 날인가 어느 쪽에선(물론 여자 쪽에서) 먼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문 작업꾼에겐 사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경은 예정된 일이고 남은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미련은 없을 것이다. 오래 전 사랑에 상처받았던 사람은 새로운 생채기를 얻기 싫어하니깐.

왕가위가 1999년 여름, 태국 방콕에서 이 영화를 처음 찍기 시작했다. 그때 왕가위의 머리 속에는 어떤 [2046]이 담겨져 있었을까. 1842년 아편전쟁에서 진 청나라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그리고 1997년 등소평이 여전히 살아있을 때 강택민 주석은 패턴 총독으로부터 홍콩을 넘겨받는다. 자본주의 대영제국에게 오욕의 식민주의 세월을 보낸 '홍콩'이 마침내 영예롭게 모국 중국에 귀환하게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중국에 편입된 홍콩 시민에게 중국 공산당 정권은 향후 50년 동안 홍콩은 변화 없이 번영과 안정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홍콩에서 영화활동을 한 왕가위 감독은 "50년 뒤, 2046년의 홍콩은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 혼자 고민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출발은 너무나 역사적이었고,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그 후 [화양연화]를 완성시키고 [2046]은 몇 번 씩 촬영 중단과 재개를 거듭했다. 당초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있었을 리 없다. 태국에서 첫 촬영에 참가했던 키무라 타쿠야는 아마도 '킬러' 역을 맡았고 액션 씬을 찍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로, 왜 싸우는 지도 모르는 키무라는 타쿠야는 (양조위의 조언에 따라) 왕가위 감독이 시키는대로 연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완성된 [2046]을 보면 미래행 기차를 탄 키무라의 몸은 상처투성이이며,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문은 끝도 없었다. 장진, 금성무, 혹은 키무라 타쿠야가 양조위의 아들로 출연한다는 것에서 아마도 그들이 양조위-장만옥의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해석도 있었다. 양조위는 이 영화가 호러영화인 줄로 알았다고도 했다. 아마도 한때 [북경의 여름](北京之夏)이란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장진(혹은 금성무)은 드럼 주자 역을 맡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5년 간 왕가위 입맛에 가장 충실하게 참석했던 장진은 불쌍하게도 두 장면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내레이터는 그가 드럼 주자였다고 말한다. (맙소사! 이게 그건가?) 어쨌든 왕가위 감독은 배우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2046]의 완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이 털어놓는 불만을 들어보면 놀랍다. 새벽부터 촬영장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들지만 감독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나타난 감독은 갓 나온 시나리오 뭉치를 던져준다. 아마도 근처 커피 숍에서 방금 수정을 거듭한 시나리오일 것이다. 양조위는 그 시나리오를 보고 배우들에게 상황설명을 한다. 그래도 양조위가 가장 왕가위를 잘 아니깐. 양조위는 이 영화가 [화양연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 혹은 달라야할 것 같아서 - 콧수염이라도 기르자고 했고 왕감독도 오케이해서 양조위는 콧수염을 기른다. 그게 [화양연화]와 [2046]의 눈에 띠는 차이이다.

왕 감독의 대책 없음에 장만옥은 이런 불평을 털어놓았다. "촬영은 끝없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재촬영한 것과 여덟 번째 재촬영한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른 채 왕가위 감독 영화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고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장쯔이는 같은 장면을 스물 번 넘게 찍고 또 찍었지만, 왜 다시 찍는지, 무슨 장면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시나리오 없이 즉흥연기를 시키는 감독은 수두룩하다! 왕가위 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영화촬영을 5년이나 하고 내놓은 작품이 허접쓰레기라면 정말 왕가위는 형편없는 감독일 것이다. 그리고 5년이나 대스타들을 절망에 빠뜨린 대가의 작품을 너무 쉽게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옛사랑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형편없는 글쟁이가 술에 취해, 여자에 취해, 돈에 쪼달려 이런저런 잡문을 쓰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런 실감나는 삼류소설인 셈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인 찰리 부코우스키(Charles Bukowski)의 작품 분위기에 맞추라고 했단다. 부코우스키가 누구지? 그는 한 평생을 막노동 등 하층계급으로 살았던 인물이란다.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은 '쓰레기 같은' 하류인생을 다루었다고 한다. 왕가위는 미술감독 장숙평에게는 '잭슨 폴락' 이미지를 요청했다고도 한다.

모든 여인네들이 정에 연연할 때 양조위는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 결국 '사랑은 얻기 어렵고, 추억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문학적 결론을 안겨준다. 관객들이 그런 단순한 사실을 인식하기에는 왕가위의 5년이나 묵은 화면이 너무나 낯설고 피곤하다. 특히 끝없는 베드씬은 괴롭기까지 하다.

왕가위의 허명에 키무라 타쿠야는 분노했고, 장만옥은 불쾌해진 듯 하다. 깐느에서 자신의 출연씬에 기겁을 한 키무라 타쿠야는 팬들의 열화 같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홍보에 전혀 나서지 않고 있다. 장만옥은 더 이상 왕가위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왕가위 감독의 '눈' 크리스토퍼 도일(두가풍) 역시 마찬가지이다. 촬영장에서 사사건건 이견을 보였다고 한다. 1년 넘게 말도 안 했다고도 한다. 결국 촬영은 이병빈이 일부 맡았고, 나중에는 관본량과 여요휘가 마무리지었다. 그 때문인지 후지필름 탓인지는 몰라도 왕가위 영화 중 최고로 CG가 많이 쓰인 [2046]은 별로 만족스러운 화면을 선사하진 못한다.

홍상수 감독이 5년 동안 한국의 톱스타를 끌어 모아 '여관방'에서 벌어지는 사랑 타령을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왕가위 감독의 다음 작품은 쿵푸-무협물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양조위가 출연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2년 전에 벌써 나왔다. 하지만 알잖은가. 그가 몇 년 후에 어떤 영화를 들고 부산영화제를 찾을지는 그때 가봐야 알수 있다는 사실을. [Reviewed by 박재환 200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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