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와 현빈이 주연을 맡은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0)가 10여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극장에 내걸렸다. 탕웨이는 김태용 감독과 2014년 결혼하였고, 현빈은 손예진과 결혼했다. <만추>는 10년이 지나서 다시 봐도, 잘 만든, 완숙한 멜로 드라마이다. 아마 시간이 갈수록 더 가치를 발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된다. 탕웨이가 한적한 주택가 도로를 정신없이 뛰어내랴오더니, 순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가 쓰러져 있고, 탕웨이는 허겁지겁 편지를 뜯어서 꾸역꾸역 삼킨다. 경찰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리고, 7년 뒤, 탕웨이가 연기하는 안나는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흘의 가석방을 얻는다. 쓸쓸한 모습의 안나가 장거리버스에 앉아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볼 때, 누군가 급하게 버스에 뛰어오른다. 훈(현빈)이다. 훈은 뻔뻔스럽게 차비가 없다며 30달러만 빌려달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안나는 남편살해범이었고, 훈은 지골로(제비족,남창)였다. 훈은 특유의 부드러움과 화술로 안나를 파고든다. 하지만 안나는 그럴 마음도, 그럴 형편도 아니다. 인연인지 두 사람은 시애틀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시애틀의 폐쇄된 공원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훈은 장례식장에도 나타나 친구인 척한다. 둘은 그렇게 만났지만 ‘안나의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훈은 허망한 재회의 약속을 하고, 2년 뒤 출소한 안나는 혹시나 하고 그를 기다린다. 버스를 감싸는 안개는 어느새 버스 정류소를, 언덕을 완전히 덮어버린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모범수로 3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은 문정숙이 위조지폐범 신성일을 만나 허망한 기다림을 갖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현재 그 오리지널 <만추> 필름은 남은 게 하나도 없다. 대신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이 오리지널에 대한 호기심을 높인다. 김태용 감독은 걸작으로 소문만 전해지는 그 <만추>를 미국 배경으로 바꾸어놓는다. 시애틀의 중국인 여자와 한국인 제비족 사이의 멜로라니. ‘만추’의 관람 포인트는 쓸쓸한 계절감에 어울리는 희망 없는 남녀의 믿을 수 없는 약속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탕웨이가 연기한 안나는 남편을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남편을 죽인 게 안나가 아닐 수 있다. 허겁지겁 현장으로 돌아와서 꾹꾹 씹어 먹는 것은 연인 왕징(김준성)에게 쓴 연서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왕징이 남편을 죽였는지 모른다. 안나는 그에 대해 말이 없다. 있다면 마지막 장례식이 끝나고 식당에서 “남의 포크를 빌렸으면 사과를 해야죠”라고 울부짖는 이유가 될지 모른다. 안나의 지독한 운명은 훈에게도 연결된다. 훈은 유부녀 옥자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옥자를 죽인 것은 그가 아니라 옥자의 미국인 남편이란 것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어쩌겠는가. 두 사람은 각자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을 나누다가, 운명의 끝에서 만났을 뿐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놀이동산에서의 ‘더빙 쇼’와 이어지는 뮤지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면 두 번, 세 번 볼 때는 탕웨이의 대사로, 현빈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로 사건을 재구성하게 된다. <만추>는 두 남녀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의 짧은 희망고문인 셈이다. 그래도 영화가 아름답다는 것은, 안개가 아름답다는 것은 불멸의 진리이다.
▶만추 리마스터링 ▶감독:김태용 ▶출연: 탕웨이, 현빈, 김준성 ▶개봉:2023년 11월8일(재개봉)/ 15세이상관람가/114분 ▶제작:빅뱅컨텐츠 배급:에이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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