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저예산독립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감독에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제작비를 안겨준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이건 피터 잭슨 감독의 <고무인간의 최후>, 그러니까 <배드 테이스트>(1987)가 떠올라 하는 말이다. 넘치는 끼, 샘솟는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불멸의 예술혼에 걸맞은 제작비가 주어진다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그 대상에는 백승기 감독이 있다.
백승기 감독 스타일로 말하자면 “세상엔 백승기 작품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나뉜다” 일지도 모르고, “끝까지 본 사람과 중간에 나온 사람으로 나뉜다”일지 모른다. 백승기 감독의 <숫호구>(12), <시발,놈:인류의 시작>(16), <오늘도 평화로운>(19), <인천스텔라>(2020)를 (만약) 본 사람이라면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작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마침내 지난 13일, 다섯 번째 작품 <잔고:분노의 적자>의 극장대개봉이 이뤄졌다. 그런데, 아무리 멀티플렉스 시간표를 찾아도 '잘'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영화이다!
영화는 패러디된 제목처럼 ‘서부극’을 지향한다.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처럼 이야기가 펼쳐진다. 줄에 묶인 남자들이 총을 든 사람의 감시 속에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대단한 로케 촬영이나 세트를 기대하지 마시라. 이들은 그냥 인천 거리와 인천의 뒷산을 걸어간다. 뒤로는 마을이 보이고, 시내버스가 다닌다. 하지만 이들은 천연덕스럽게, 이곳은 텍사스이고, 노예이고, 노예상이란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타고 있다. (이번 작품도 초초초초저예산이란다!)
화면은 주인공의 회상 신으로 돌아간다. ‘잔고’(정광우)의 꿈은 영화감독. 여동생 잔디(정수진)와 함께 택배일을 열심히 하며 내일의 봉감독을 꿈꾼다. 동생이 유명연예기획사로 갈 기회가 생기자 전 재산을 내놓지만 그것은 노예의 길. 통장 잔고 제로에서 이제 노예로 전락한 잔고는 노예상에게 끌려간다. 그때 나타난 무자비한 현상금 사냥꾼, 닥터 솔트(서현민). 닥터 솔트는 잔고를 구해내고, 이제 ‘잔디’를 노예계약으로 묶어둔 악당 ‘레오나르도 빚갚으리오’(손이용)를 향한다. 분노의 총을 들고.
이 영화는 기대치를 최대한 낮추고, 희망을 최대한 판타스틱하게 가져야 재밌는 영화이다. 왜 그런지는 보면 안다. 백승기 감독은 초초초저예산 서부극을 만들기 위해 ‘말’과 ‘총’을 눈물겹게 영화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둔 듯 전편 영어대사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렇게 효율적인 서바이벌 잉글리시, 압축 영어가 가능하다니! 관객들은 자막을 보면서, 대사를 들으면서 또 다른 잔재미를 느끼게 된다. 물론, “That is all!”
사실 이 영화는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가 아니라 테리 길리엄과 테리 존스의 <몬티 파이튼과 성배>(1985)를 떠올리게 한다. 순전히 말(馬) 장면 때문이다. 아서왕은 말을 타지 않았지만 코코넛열매의 박자 소리에 관객들은 어느 순간 마상 모험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몬티 파이튼’은 아서왕 시대의 역사와 민중투쟁, 정치적 풍자 등 브리태니커급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미국의 노예비극’도 ‘한국의 연예인 노예계약’도 언급은 되지만 왜 나오는지 모른다. 백승기 감독의 여섯 번째 작품은 저예산에 가려진, 한 뼘 자막으로 퉁 친, 넘치는 예술혼과 창작열을 열정 뒤에 숨기지 말고 그 진정성을 더 많이 앞으로 끌어내었으면 한다.
참, 극중에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마고 로비, 크리스토퍼 놀란, 왕조현, 장백지 등 호화찬란한 이름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 ‘경영리’와 ‘수미킴’도 나온다. 물론, 이경영과 김수미를 패러디한 캐릭터이다. 백승기 감독이 ‘경영리’를 연기했다. 참참. <몬티 파이튼과 성배>는 넷플릭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감독/각본/편집:백승기 ▶출연: 정광우(잔고), 서현민(닥터 솔트), 손이용(빚갚으리오), 정수진(잔디), 손규진(쿠엔틴), 조근직(영클), 신예주(쥬쥬) ▶개봉:2023년 9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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