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5. 13:48ㆍ한국영화리뷰
[사라진 시간] 교사와 형사, 그 누구의 삶
* 영화내용을 알려주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취업반 학생들의 좌절과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1992)에서 선생님 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딘 정진영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국어국문학과 출신의 정진영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맡은 작품은 <사라진 시간>이다. 정진영의 커리어만큼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딘가 홀린 듯한 모습의 조진웅을 보여준다. 스쳐가는 사람들. 이어 한적한 소도시의 작은 집을 보여준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인 수혁(배수빈)의 집이다. 아내 이영(차수연)과 함께 하는 한촌의 행복한 모습이 지나가면 왠지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가, 그들이 시골에 내려와서 은둔하듯 사는 이유가 밝혀진다. 아내는 밤이 되면 ‘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치 해리성 정체장애처럼. 남편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코미디언 이주일이 되는가 싶더니, 어제는 역도산이 되었다. 남편은 그런 비밀스러운 사연을 안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화재사고가 나고 부부는 철문이 굳게 닫힌 다락방에서 불타 죽는다. 박형구(조진웅) 형사가 수사를 맡는다. 뭔가 미심쩍다. 박형구는 하나같이 수상한 마을사람이 모두 모인 마을회관에서 송로버섯으로 빚은 술을 마시고는 잠이 든다. 깨어나니, 세상이 이상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같은 화면이다. 흑백의 영상에서 조진웅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조진웅은 흠칫 그들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진웅’이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형사일까, 초등학교 교사일까.
영화의 재구성
영화는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자신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은 변했고 자신도 변한 듯하다. 이제 이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사람과 사건을 꼼꼼히 관찰하고 복기할 것이다.
배수빈과 차수연은 상상의 인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쓰는 소설 속 인물일 수도 있다. 창작 속 인물은 제한적인 역할을 하고, 필요할 때만 등장하여 주인공을 혼란시킬 것이다. 초등학교 교실은 언제나 수학시간만 있고, 비현실적인 이름-전지현, 박지성, 박주영-의 가족이 등장한다. 많은 영화에서 보아온 약물중독이나 환각, 혹은 끔찍한 사고나 가족해체의 충격이 가져오는 편집 증세는 없다. 정진영 감독은 그런 상상 가능한, 혹은 설명 가능한 이야기를 묘하게 배치한다. 시골마을의 부부와 읍내 아파트의 가족을 연결시키려고 고라니도 등장시키더니 서장 부인도 끌어들인다. 마지막 혼란은 뜨개질 강사(이선빈)의 역할이다.
정진영 감독은 애정을 쏟은 캐릭터에게 공통된 성격을 부여한 셈이다. 그들이 동일 증세를 갖고 있는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창조해낸 허상일 수도 있다. 그런 혼란스러움을 배제하면 조진웅이라는 캐릭터의 고통과 고독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시점을 돌파한다면 <사라진 시간>속 이야기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만큼 매혹적인 것이다.
조진웅은 찬바람이 부는 읍내를 걸어가며 “나는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2020년 6월 18일개봉 15세관람가 (KBS미디어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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