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브레이션] 아버지는 죽었다! (토마스 빈터버그 감독 Festen/The Celebration,1998)

2019. 8. 27. 10:11유럽영화리뷰

반응형

 (박재환 1998.9.22.) 어느 해인가 칸에 모인 발칙한 젊은 영화인들이 기존영화의 타성 주제 뿐만 아니라, 촬영, 영상효과 등 제작기법에까지 스며든 모든 타성을 타파하겠다며 도그마95’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중무장한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데뷔작은 이제, 그러한 경향의 대표적 작품으로 우리에게 충격과 당혹감을 안긴다. 이 영화는 그러한 현대 영화의 한 조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만도 훌륭한 작품이며, 이런 영화를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부산영화제는 정말 좋은 영화제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덴마크 영화이다. 아마, 덴마크는 우유-낙농제품만 만들든지, 아니면, 그 동네가 풍차의 나라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헷갈리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날아온 이 영화는 그들이 타파하려했던 기존 영화의 진부한 미학적 토대의 거부, 신경향의 수립이라는 엄청난 성취보다도 우리에게는 역시, 그 주제 의식의 충격성으로 더욱더 놀랍다.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가장 사회문제 되고 있는 것이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성폭행 -성적 노리개로서의 유아(때로는 영아) 대상 범죄이다. 많은 입양아, 3세계에서 벌어지는, 그리고 매매되는 가난한 아이들이 당하는 그러한 범죄적 행위는 유럽문화의 부패정도와 정신건강의 황폐함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 영화도 그러한 경향을 다루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친아버지에 의해 자행되는 어린 아들과 어린 딸을 상대로 한 강간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도그마95’의 정신에 따라, 핸드헬드 방식의 카메라작업으로 찍었다. 왕가위 영화에 익숙하더라도, 이런 전편 헬드헬드 방식의 흔들리는 화면은 금새 눈에 피로감이 몰리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흔들리는 피사체, 초점이 때로는 벗어나는 인물군의 흐릿한 영상, 건너뛰는 동작들이 계속된다. 그럴수록 영화란 것이 지어낸 영상미학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눈치 못 채게 일어나는 일상사를 다룬 필름이란 것을 알려준다. 

유럽의 어느 한적한 시골길에 차들이 달려간다. 그들의 목적지는 한 호텔. 지금, 이 호텔 주인의 환갑잔치가 열린다. 이미 성장한 자식들이 하나둘 속속 호텔에 모여든다. 친척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까지 초대되었다. 차들의 행렬 속에서 큰아들 크리스틴과 막내 미첼을 보여준다. 짧은 시간의 이들의 행동과 대화 속에서 크리스틴은 엄청난 비밀을 가진 말없는 장남으로서의 위상을, 망둥이 같은 막내 미첼의 입지를 보여준다. 미첼은 아내에겐 난폭하고, 주위 사람에겐 안하무인이며,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딸 헬렌도 도착한다. 헬렌은 언니가 자살했다는 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원래 이 집안에는 린다라는 딸이 있었다. 린다는 그 방의 그 욕조에서 자살한 것이다. 그리고, 유서를 숨겨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보물찾기 놀이에 따라 헬렌은 그 유서를 찾아내고는 읽고 그냥 한없이 울기만 한다. 그리고는 아무도 못 보게 숨겨둔다. 

저녁이 되어, 환갑잔치- ‘축제=셀레브레이션’-는 시작된다. 모두들 흥겨워한다. 품위와 성공, 인자함, 가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노친네의 환갑을 축하한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한창 고조될 때, 큰 아들 크리스틴이 조용히 일어나서, 숟가락으로 잔을 쨍~ 친다. 연회석을 가득 메운 50여 명의 일가친지들의 시선이 모여졌을 때, 크리스틴은 조용히 축사를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환갑에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우리 아버지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군요. 어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나의 쌍둥이 누이를 성폭행하신 아버지가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계시다니 너무 행복하군요. 나와 내 여동생을 강간하였고,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를 위해 건배일순간 연회장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엄과 어머니의 연설로, 이 모든 넌센스는 큰아들의 주정, 혹은 정신병적 돌출발언으로 만들고 만다. 

크리스틴은 처음 이 호텔에 올 때처럼, 외롭게 떠나가려 하는데 주방장 킴이 그를 막는다. “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 난 너의 행동을 이해해. 넌 여기서 그냥 떠나가면 결국 지는 거야. 모든 것을 밝히란 말야!” 크리스틴은 이내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온다. 다시 잔을 쨍쨍 치고, 시선이 모일 때, 다시 연설을 한다.

 

아까, 말이 확실치 못해 아버님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깨끗한 분이셨죠. 언제나 목욕을 했죠. 목욕을 하기 전에 하시는 일이 있었는데, 저와 린다를 서재로 데려가서는 강간하는 일이었죠. 아직도 깨끗한 생활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크리스틴에 대한 야유와 고함.

 어머니, 19****. 서재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의 단단한 물건이 제 얼굴을 뭉개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셨죠. 어머니가 하신 일요? 나가라는 아버지 말에 순종하셨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일의 진실 여부는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달렸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그의 여자없는 외로운 생활이 증명하듯 그는 많은 문제점과 병적 기질을 가진 자식이라는 것.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미첼에 의해 건물 밖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나머지 하객들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흥청대며, 이 끔찍한 일을 잊으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크리스틴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다. 이때, 헬렌의 남자친구-흑인-가 도착하고, 미첼은 인종적 편견에 가득한 욕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곧이어, 모두들, 나치식 편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흑인에 대한 조롱과, 이방인에 대한 끝없는 증오말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더 흥청대며, 모두들 악몽을 잊어버리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틴의 진정한 이해자인 호텔의 하녀가 방을 뒤지다가 헬렌의 숨겨둔 유서를 찾아낸다. 다시, 연회장. 겨우 연회석에 들어온 크리스틴은 여전히 아버지를 쏘아보고, 아버지는 애써 외면한다. 그리곤, 이젠 바통은 헬렌에게 넘어간다. 

우리 가족의 방식대로, 이제 오빠가 주는 편지를 여동생이 읽는 거야하며, 그 유서를 넘겨준다. 헬렌은 그제야, 그 유서의 의미를 진실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울먹이며 읽어 내려가던 헬렌도 점점 단호해진 목소리로 분노하기 시작한다. 내용인즉슨, “우리 형제자매 중 하나가 이 글을 읽게 되겠지. 난 지금 떠나갈 것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어쩌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틴 오빠,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안 되더군요. 이제 저 세상에 가면, 난 누구의 고통도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에요.”

 편지를 다 읽은 후, 연회석의 사람들은 여태껏 믿지 않으려고, 잊으려고 발버둥 치던 악몽같은 말들이 사실이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쏟아지는 비난의 눈길을 피해, 자리를 뜬다. 그날 밤, 거의 미쳐버린 미첼은 아버지를 찾아가 폭행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권위는 없어요. 우리 집안은 이제 끝난 거에요..” 

다음날 아침, 우울한 모습으로 식당에 모여든 하객들이 식사를 시작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온다. 그리곤, 아버지가 연설한다. “이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떠나가면, 이젠 두 번 다시 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어.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 난 나의 아들과 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리고, 크리스틴. 넌 훌륭하게 진실을 밝혀내었어. 축하해.” 

미첼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서는 아버지의 연설 무척 훌륭했어요. 이제 우리 밥 먹게 나가 주시죠.” 그런다. 아버지의 권위, 가장의 위풍은 무너졌다. 그리고, 이제, 지난 수십 년간 악몽에 시달렸던 크리스틴은 평안을 찾게 된 것이다. 영화는 여전히 흔들리며 끝난다.

이 영화는 그 소재, 주제의 충격성이 관심거리이다. 닉 놀테가 나온 <사랑과 추억>에서 소년때 당한 성폭행 (아버지가 아니라, 탈옥수에 의해, 엄마, 누나, 어린소년 닉 놀테가 당했던 그 충격)이 얼마나 오랜 세월 침묵과 가족간의 암묵적 비밀을 만들어 버렸는지를 보라. 그것은 피해자에게 인생의 나머지를 정신과 치료와 모든 사람에 대한 적대감, 자신감 결여 등. 한 인간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크리스틴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공포와 굴종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살한 린다를 떠올리며, 결국, 사슬을 끊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 권위의 상징, 아버지를 저만치 땅바닥에 내다꽂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신문사회면에서 본다. 문제는 계부나, 입양아에 대한 성폭행이 아니라, 친부에 의해서 자행되는 동물만도 못한 성학대라는 것이다. (최근에 본 <301302>의 황신혜의 경우도 그러하다) 몇 년 전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 (판사였던가?) 아버지에 의해 십년 가까이 성적 노리개가 되었던 여대생이 남자 친구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이 남자가 이 짐승를 죽이려 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곤 여성단체, 인권 단체에서 구명운동을 펼친 적이 있는데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부장의 권위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은밀한 폭력의 암울함은 한 문명의 종말이요, 세기말의 증후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권위는 떨어졌고, 사라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 권위를 쥔 사람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온 아버지 같은 형편없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머지 아버지들까지, 그들의 자리를 내놓게 생긴 것이다. 영화는 충격으로 끝난다. (박재환 1998/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