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1951년 1월 거창 겨울골짜기 (김재수 감독 2013)

2013. 12. 26. 15:49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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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심각하게’ 토론회를 가졌을 만큼 용어정리/개념정립이 안 된 것이 있다. 바로 ‘일군의 독립영화들에 대한 명칭문제’이다. ‘독립영화’란 것이 ‘충무로 거대자본의 스튜디오에 종속되지 않은 저예산영화’를 일컫는 말이긴 한데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수입영화의 경우 예술영화, 인디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와서는 ‘다양성영화’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여하튼, 송강호가 나오고 CJ가 만든 영화가 아닌, 지루한 영화, 혹은 감독이 생업(?)을 포기하고 뭔가 주제의식을 전하려 6밀리 카메라로 고생하며 찍은 의식 있는 영화를 일컫는다. 아닐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최근 나온 이런 영화들은 주로 정치적이거나 논쟁 지향적이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나, ‘천안함 프로젝트’, 그리고 작년 연말 대선을 즈음하여 ‘MB의 추억’ 이런 게 나왔다. ‘지슬’이란 영화도 있었고. 625 발발 한 달도 안 되어 미군들에 의해 자행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이란 영화도 있었다.

오늘 ‘청야’라는 영화가 개봉되는데 전형적인 ‘독립영화’이다. 감독이 전적으로 독립운동하듯이 찍었으니 말이다. ‘청야’는 1951년 6·25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경상남도 거창군의 겨울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양민학살사건의 이야기를 다룬다. 벌써 “빨갱이영화~”라고 인상 찌푸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 당시 죽은 사람도 억울한데, 아직도 그런 이미지로 남아있다는 것은 말이다!!!

TV다큐 감독, 거창을 품다

차동석(김기방)은 방송사에 괜찮은 아이템을 하나 내놓는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 당시 쉰들러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것이다. 차 피디는 치매 걸린 할아버지(명계남)와 그 손녀(안미나)를 데리고 무작정 거창으로 향한다. 거창군청 관계자의 협조와 거창 주민의 도움으로 60여 년 전의 사건에 뛰어든다. 알고 보니 이 노인은 거창양민학살사건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군인이었고, 그 노인의 지갑에 오랫동안 보관되어있던 낡은 사진 속 주인공은 그날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녀였다.

덜컹거리는 영화

‘청야’의 감독 김재수는 2001년 ‘클럽 버터플라이’를 감독했던 충무로 영화인이다. 그 후 영화 일을 접고 거창으로 귀농 길에 오른다. 거창에 내려간 뒤에 ‘거창양민학살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창사람들마저 그 일에 관심을 잊는 것을 보고는 영화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창군과 거창출신의 기업인을 통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이 작품을 찍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2억 4천만 원이라는 정말 초라한 예산으로 말이다. 그래서 ’거창양민학살 사건 당시‘ 연대급 군인이 수백 명의 주민들을 산으로 몰고 가서는 구덩이 속에 몰아세워서는 총을 마구 쏘아대는 ’블록버스터‘ 영상은 기대하지 마시라. 영화의 대부분은 6밀리 카메라를 든 피디가 2013년의 거창을 찾아가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화의  대부분을 채운다. 정작 거창사건은 회고장면도 아니다. 2분 3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상징화한 거친 삽입영상이 전부이다. 당연히 영화의 완성도는 지극히 낮다고 봐야할 것이다. 대신 이 영화는 김재수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1951년의 거창‘과 그 이후의 무관심에 각성과 관심을 촉구한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이란?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김일성의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고 남으로남으로 밀고 내려온다. 9월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이 북으로북으로 진격하지만 1월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투입되면서 전선은 또다시 남하된다. 그리곤 38선을 중심으로 향후 3년 동안 밀고당기고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 초기에 남쪽까지 파죽지세로 몰려왔던 인민군 가운데 후퇴(퇴각)하지 못하고 남쪽에 낙오되었던 인민군 잔존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서 빨치산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국군의 입장에선 삼팔선 이북으로는 총진격전이 벌어지고 남쪽에서는  후방을 교란시키는 빨치산 소탕작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1950년 10월 무렵 11사단 (최덕신 사단장)이 호남, 지리산 지구 토벌을 전담한다. 최덕신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펼친다. 자신의 방벽을 튼튼히 하고 적의 근거지를 말끔히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장개석의 국부군이 모택동의 게릴라를 상대했던 전술이었다. 당시 국군이 소탕할 세력은 지리산으로 몰린 인민군 패잔병, 좌익세력, 인공부역자 들이었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낮이면 국군, 밤이면 인민군’ 같은 혼란의 시기가 거듭되고 11사단의 소탕작전도 도를 더하게 된다. 결국 1951년 2월 10일~11일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대량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난다. 11사단 9연대(오익경) 3대대장(한동석)의 국군이 무고한 양민을 마구재비로 쏘아죽인 사건이다. 모두 517명의 대한민국 민간인이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학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곧바로 당시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국회조사단의 조사가 시작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해임했고, 그해 말 열린 군법회의에서 오익경 연대장은 무기징역, 한동석 대대장은 10년 형을 받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두 사람은 1년 정도 복역한 뒤 모두 특사로 풀려난다. 전쟁이 끝난 뒤 거창 유족들은 유골을 모아 합장하고 묘비를 세운다. 1960년 419직후 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꾸려지고 신원면 희생자 517명을 포함, 모두 719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놀랍게도 516 후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유족회는 반국가단체로 지목됐고, 세워진 묘비는 정으로 쪼인 채 땅속에 묻히고 봉분은 파헤쳐졌다.

한국전쟁 전후의 비극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비극은 단지 노근리 사건(작은 연못)과 거창(청야)에서만 일어났던 국지적, 우발적 건은 아니었다. 2005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700여 건의 ’민간인 학살 피해‘가 수록되어있다. 실태보고서는 1950년 전쟁발발 이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1945년 광복이후의 모든 사건을 다루고 있다. 많이 알려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학살, 제주 43항쟁 등을 포함한 것이다.

물론, 이런 예민한 문제를 간단하게 서술할 수는 없다. 전쟁 초기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마구 내려올 때 수원형무소나 전국의 교도소에 있던 죄수들은 어찌 되었을까. 수천 명의 재소자가 모두 처형당한다. (북한군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  그런데 <<실태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다른 자료를 보면 이런 사실도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평양형무소에는 우물마다 시체가 가득했고 마당에는 생매장당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여준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 대해 피해배상/보상은 거의 다 이뤄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발발 직후 국회에서 진상조사까지 펼쳤던 거창사건은 여태 피해자 유족에 대한 피해배상, 보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단다.

1995년 12월 거창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금전배상이나 보상에 관한 규정이 없었고, 2004년 3월 사상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금,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의 지급을 내용으로 하는 거창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으나, 당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행사로 결국 16대 국회에선 자동 폐기되었단다. 당시의 정부입장은 이랬단다. “6ㆍ25전쟁 관련 배상법안이 잇따라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현(19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인데 최종입법 여부는 미지수라고 한다.

 

▶  청야 시사회 관련기사 보기

2013년 12월 20일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진행된 '청야' 시사회 무대인사
(김재수감독, 영화속사진-포스터 아역배우, 거창군수 이홍기, 안미나, 김현아, 이대연, 장두이)

대한민국이 그렇다.

 ‘청야’가 오늘 개봉한다고 했는데 상영관이 전국에 딱 하나이다. 부산의 한 극장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상영리스트에 없다. ‘청야’ 보기는 어렵다. 대신, 도서관에 가서 김원일이 쓴 소설 <<겨울골짜리>>를 찾아 읽어보시라. 1987년, 소설가 김원일이 발로 뛰며 자료를 찾아 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박재환, 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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