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맘보] 타이베이의 청춘은 나이 들고, 유바리의 눈은 녹을 것이다 (허우샤오셴감독, 2001)

2025. 1. 11. 17:13대만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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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맘보

지금은 한낱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서기 2000년 1월 1일 00시를 앞두고 IT업계에서는 ‘밀레니엄 버그’(Y2K)라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혹은 마케팅 수단)였다. 수십 억 년의 지구, 수백 억년의 우주의 나이와 비교하면 단지 새로운 ‘1000년’의 시작일 뿐인데 ‘밀레니엄’의 공포와 환희를 당시 지구인은 그렇게 즐긴 것이다. 대만의 명감독 후효현은 이 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제목에서부터 시대의 미묘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밀레니엄 맘보>가 2001년 개봉되었었다. 그때 감독 나이는 54살이었다. 장년의 그는 인류역사의 한 획을 긋는 밀레니엄에  즈음하여 대만의 청춘을 이렇게 바라보고, 스크린에 담은 것이다. 영화는 ‘밀레니엄 그 해’에서 1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10년 전’을 회상하는 여자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채워진다.

이야기는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는 듯 하지만 여자와 남자, 그리고 또 한 남자를 따라가기에 족하다. 비키는 네온불빛이 명멸하는 육교(基隆 中山陸橋)를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본다. 마치 패션화보의 한 장면처럼. 비키는 오늘도 호텔 바에서 친구들과 어울러 하릴 없이 술을 마시고, 의미 없는 수다를 떨며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고 있다. 그리고는 남친 샤오하오와의 희망 없는 동거생활을 보여준다. 그 남자와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지질한 인연이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지를. 샤오하오는 애당초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의지도 없다. 술과 마약에 취해 오늘도 비키의 등골을 빨아먹고 있을 뿐이다. 비키에게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샤오하오는  비키의 지갑을 뒤지고, 비키의 돈벌이를 의심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주먹을 휘두른다. 비키는 지금 갖고 있는 돈만 다 써버리면 이 남자 곁을  떠날 것이라고 다짐한다. 어느 날인가 술집에서 만난 일본인 형제를 따라 하얀 눈이 천지를 뒤덮은 유바리를 찾는다. 낭만은 짧다. 돌아온 타이베이의 삶은 전혀 변화가 없다. 그러던 중 술집 손님 중 ‘조직의 형님’ 가오제를 알게 되고 처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것도 잠깐일 뿐. 그 돈 많고, 여유가 넘치는, 그래서 더욱 남자다운 가오제는 잠시 일본으로 떠난단다. 비키는 그 남자를 찾아 도쿄로 온다. 한참을 찾아 헤매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다. 사라진 것인지, 버림받은 것인지. 비키는, 10년 전을 떠올린다. 


허우 감독의 작품을 꾸준히 따라잡아온 영화팬이라면 <동년왕사> 같이 풋풋한 대만의 고향이야기 같았던 일련의 작품에 매료되고, 대만의 아픈 역사를 담은 <비정성시> 같은 작품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밀레니엄 맘보>와 함께 흔들리는 청춘을 영접하게 된다. Y2K와 함께 찾아온 시대의 혼란은 대만 청춘의 목적지 없는 방황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비키와 샤오하오는 결국 같은 청춘이다. 샤오하오가 “우리는 같은 세계 출신이 아니야. 너가 나의 세계에 떨어진 거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작은 세계에서는 단지 여기서 저기로, 잠시 운명을 같이 한 덧없는 청춘일 뿐이다. 그것은 지룽(기륭)과 타이베이의 거리뿐만 아니라 퇴락하는 유바리와 도오쿄도 같다. 

거장 후효현 감독은 갑자기 왕가위라도 된 듯이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필름에게 박제시킨다. 난사하는 조명도, 심장을 두들기는 EDM도, 유바리의 하얀 눈도 이제는 우주로 사라진 그 때의 미약한 생존 신호음인 듯하다. 

이 영화가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다. 한때 (대만 출신임에도) 홍콩의 섹시 심볼로 통하던 서기는 후효현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지난 2016년에는 홍콩출신의 펑더룬(馮德倫)과 결혼하였고, 올해 강동원, 유태오 등과 나란히 미국 아카데미협회 회원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년에는 그녀가 ‘감독’한 영화 <소녀>(女孩)가 개봉될 예정이다. 한 때 부산국제영화제의 단골 VIP였던 후효현 감독은 대만 신낭조(뉴웨이브)를 이끌었고, 2015년에는 <자객 섭은낭>으로 깐느 감독상을, 2020년 대만 금마장에서 종신업적상(명예상)을 받았다. 2023년, 신작을 준비하던 그가 영화계를 은퇴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밀레니엄 맘보 ▶원제:千禧曼波/Millennium Mambo ▶감독:후효현(侯孝賢/허우샤오센) ▶극본:주텐원(朱天文/주천문) ▶출연: 슈치(舒淇서기/Vicky), 똰춘하오(段鈞豪단균호)/샤오하오), 가오제(高捷고첩/지에꺼), 뉴청쯔(鈕承澤뉴승택/또우즈) ▶개봉:2024년 12월 31일/청소년관람불가/10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