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분자] 공포는 디테일에 있다 (양덕창 감독, 恐怖分子 The Terroriser 1986)

2020. 9. 17. 07:25대만영화리뷰

반응형

012

양덕창(楊德昌/양더창, 에드위드 양) 감독은 후효현(허샤오센)과 함께 대만이 자랑하는 세계적 감독이다. <고령가 소년살인사건>과 <하나 그리고 둘>을 비롯하여 대만 신낭조를 대표하는 걸작들을 남긴 감독이다. 이중 <고령가 소년살인사건>과 <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는 이른바 양 감독의 ‘타이베이 3부작’으로 불린다. 흔들리는 대만의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필름에 잡아낸다. 코로나사태 속에 <공포분자>(원제: 恐怖分子)가 17일 한국에서 개봉된다. 1986년 대만에서 개봉된 이래 무려 34년 만에 한국극장가에 정식으로 선보이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시네마떼크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래전 ‘분도비디오’라는 전설적 단체에 의해 비디오도 출시된 적이 있다. 그 영화를 이제 극장에서 정식으로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만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되었지만 여전히 화면은 클래식하고, 오디오는 난처하다.

<공포분자>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 작품은 탈레반이나 공산세력, 혹은 전공투의 정치적 투쟁 같은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 무엇이 양덕창 감독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안겨주었을까.


으스름한 새벽녘의 타이베이. 요란하게 경찰차 사이렌이 울려 퍼지더니 경찰이 악당들의 아지트를 포위하고 진입을 준비 중이다. 입대를 앞둔 샤오창은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려고 한다. 이때 숙안(淑安)이 건물을 빠져나와 달아나다 다리를 다친다.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샤오챵이 병원으로 데려다준다. 한편, 작가인 주울분(周郁芬)은 도통 글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이고, 병원 연구실에서 일하는 남편(이립중)은 예기치 못한 인사문제에 휩쓸리게 된다. 남편은 성실근면하게, 그야말로 소처럼 일만 하며 아내의 창작고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불량소녀 숙안의 장난전화로 이들의 삶이 뒤엉키게 된다.

영화는 독립적인 캐릭터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더니, 묘하게 하나의 사건으로 모이게 되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결론으로 치닫는다. 이립중과 주울분은 위기의 부부이고, 주울분과 심사장은 과거의 연인이자 지금은 불륜일 수도 있다. 샤오창은 사건의 주동자는 아니지만 인물들을 연결시킨다. 불량소녀 숙안의 장난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인물은 궁지에 내몰린다.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해결책인 권총의 제공자가 되어 버린다. 영화는 이처럼 관계없는 사람들, 관계있는 사람들, 관계가 끊어지려는 사람들이 맞물러 돌아가더니 마지막에 이립중의 자살로 사건이 종료된다.

영화는 각자의 캐릭터가 우연히 한 선상에서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주된 플롯은 소통하지 못하는 부부의 비극이다. 또한 이야기는 그 작가가 창작한 ‘결혼실록’ 소설의 내용이기도 하다. 소설은 허구지만, 그들의 삶은 현실적인 것이다.  

등장인물은 자신의 삶에 집중한다. 부부사이에서도, 연인관계에서도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중 주을분과 이립중 부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편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간다. 고리타분한 매일의 삶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귀가하면 화장실로 직행하여 손을 꼼꼼하게 씻는다. 아내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담배를 핀다. 그리고는 어느 날 부딪친다. “이래도 모르겠어? 아마 영원히 모를 거야. 당신과 결혼했을 때도, 아기를 가지려고 했을 때도, 다시 소설을 쓸 때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였어.” 그러면서 집을 나선다. 아내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고리타분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팝송 ‘Smoke gets in your eyes’가 의미심장하게 쓰인다. 진실한 사랑을 어떻게 아냐고. 사랑의 불꽃이 가슴에 타오르고, 사그라질 때 눈앞은 연기로 흐려진단다. 엔딩송은 이 영화 찍기 전 해에 감독과 결혼식을 올린 대만 여가수 채금(蔡琴/차이친)이 부른 ‘請假裝?會捨不得我’이다. “내일은 헤어져 혼자가 되더라도 지금은 나를 안아주세요. 날 떠나지 않을 것 같이 있어주세요.”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노래 가사까지 음미한다면 영화는 꽤나 씁쓸하다.

1986년 대만 금마장 영화시상식에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이 트로피를 휩쓸 때, 양덕창 감독의 <공포분자>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박재환 2020.9.1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