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7. 14:41ㆍ한국영화리뷰
[리뷰] 윤희에게, 엄마와 딸의 오타루 여행
*스포일러 주의 *
2017년 연말에 개봉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전형적인 독립영화이다. 천안의 작은 이발소 주인은 암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첫사랑을 찾아 서울로 올라오며 ‘아버지가 젊은 시절’ 품었던 영화감독의 꿈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버지는 ‘찰리 채플린’이 되어 왕년의 꿈을 이룬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TV에서 방송되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잔잔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만든 임대형 감독이 두 번째 내놓은 작품 <윤희에게>는 지난달 열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여자’ 윤희, 편지를 받다
윤희(김희애)는 남편(유재명)과 이혼하고 고교졸업반인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그럭저럭’ 살고 있다. 공사장 식당의 조리사로 새벽이면 승합차에 몸을 싣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삶. 한편,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의 눈 덮인 마을에 사는 준(나카무라 유코)도 ‘그럭저럭’ 살고 있다. 고모 집에서 고양이와 살고 있는 준은 동물병원 수의사이다. 어느 날 고모가 준의 방을 청소하다 부치지 않은 편지를 발견하고는 대신 우체통에 넣는다. 보낼 생각은 없었던, 그러나 그럴 운명이었던 편지는 윤희에게 배달된다. 이제 윤희는 딸과 함께 눈이 소복이 덮인 오타루로 짧은 여행을 오면서 오래 전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부치지 못한 러브레터
‘윤희에게’는 남성감독이 만든 여성영화이다. 영화의 감성은 오타루에 내리는 하얀 눈처럼 고요하고, 정갈하다. 한 밤 아파트 앞에 기다리는 술 취한 유재명의 등장에 ‘가정폭력’을 다루는 것인가 하다가 어느새 알콩달콩 모녀의 기이한 여행담에 빨려들게 된다. 임대형 감독은 ‘오타루’를 다루면서 ‘러브레터’의 감성과 이미지를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 그 정서까지 고스란히 재연한다. 관객들은 준이 편지를 부치지 않았던 이유나, 윤희의 현재가 ‘그럭저럭’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며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조용히 동참하게 된다. 감독은 최대한 그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이끈다.
눈과 카메라, 그리고 김소혜
임대형 감독은 이번에도 사진 찍는 행위의 숭고함을 담는다.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는 새봄의 극중 대사처럼 피사체를 대하는 그만의 ‘가업’이리다. 영화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김희애는 그런 사정의 중년의 연기를 아름답게 소화하고, 비슷한 처지의 나카무라 유코는 고급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김소혜와 성유빈이 펼치는 젊은이의 연기도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유재명과 고모의 연기조차 작품을 완벽하게 장식하는 역할을 한다.
아마 <윤희에게>를 보고 나면 ‘러브레터’를 다시 찾든지, 오타루 여행정보를 구해볼지 모르겠다. 그들의 첫사랑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첫사랑을 돌이켜보게 되는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영화이다. 11월 14일 개봉 (KBS미디어 박재환)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2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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