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내 영혼의 힐링 무비

2012. 11. 18. 22:52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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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힘을 이야기할 때 박찬욱과 김기덕 감독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K팝, 아니 한국가요를 이야기할 때 싸이와 소녀시대만 언급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해에 천만 관객영화가 두 편이나 나오고, 베니스대상수상 영화감독이 투덜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현실이 엉망진창의 혁명적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하게 영화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편식이 유달리 심하다는 것. 그리고 그 수요를 알 수 없는 시네필의 분노가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나 특별한 영화를 보려면 다리품을 많이 팔아야하고 유달리 부지런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터치’라는 영화만 보아도 말이다.

감독 민병훈을 말한다

영화 <터치>를 말하기 전에 민병훈 감독을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아마도 산업적 변화와 함께 새로운 피가 충무로에 꾸준히 유입된 것이다. 민병훈 감독이 그러하다. 한국에서 공부한 것도, 미국유학파도 아니다. 특이하게도 러시아영화학교에서 영화를 배웠고 데뷔작부터 ‘특이한 지역’에서 시작했다.  <벌이 날다>(98)라는 영화이다. 잠셋 우즈마노프과 공동연출을 했던 이 영화는 타지키스탄의 한 마을의 우물에 얽힌 아날로그와 노스탤지어 감성으로 충만했던 영화이다. 민병훈 감독이 한국으로 와서 두 번째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가끔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가 어렵게 어렵게 제작비를 마련하여 새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의 소망과는 달리 국제영화제를 통해서만 겨우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괜찮아 울지마>(01), <포도나무를 베어라>(06)가 그렇게 영화팬을 찾았다. 민병훈 감독의 <터치>도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 힘들게 극장에 내걸렸다. ‘광해’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 ‘늑대소년’이 울부짖음이 계속되는 그 공간에 ‘터치’가 내걸린 것이다. 그리고 민병훈 감독은 김기덕 감독만큼 분노했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횡포에 자신의 영화가 퐁당퐁당식 상영 당하고 있다며 분연히 종영을 선언했다. ’터치‘는 그렇게 잠깐 우리에게 왔다가 그렇게 사라져간다. 나중에 TV나 다른 미디어 방식을 통해 찾아볼 운명인 것이다.

김기덕과는 또 다른 드라마

민병훈 감독의 이번 영화는 김기덕 영화에서나 봄직한 지독한 상황에 내몰린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를 펼친다. 유준상은 중학교 사격코치이다. 아내 김지영은 병원에서 노인환자의 간병인이다. 이들에겐 유치원 다니는 딸이 있고 이들 부부는 자본주의사회, 2012년의 대한민국을 사는 중산층의 위태로운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비극의 시작은 유준상이 알코올 중독자란 사실. 지금 초인적 의지로 술을 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사격대회에선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없고, 학교에선 사소한 문제가 점점 커져간다. 2년제 기간제 코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술을 마셔야하고 곧바로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면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아내 김지영도 마찬가지로 절망의 늪에 빠져든다. 간병인의 세상에서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줄이야.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원치 않은 술을 마셔야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은 길로 나가야했다. 결코 아내에겐 말할 수 없는. 아내 또한 딸을 위해 남편을 지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걸어간다. 상황은 악화되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발버둥친다. 그 사이 딸에게도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오고....

절망의 끝에서 보는 한줄기 희망의 빛

이 영화에서는 사람만큼이나 사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테렌스 말릭의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판타스틱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디선가 사슴이 걸어온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눈빛을 하고. 남편 유준상도, 아내 김지영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슴을 만나고 사슴을 스쳐지나간다. 남편이 실직하고 엽사들과 함께 푼돈을 벌어야할 때 자신의 눈앞에 다가온 사슴에게 총을 겨누다 멈칫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이사장의 복직허가 전화를 받는 것이다. 또 한 번의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고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는 것도 사슴이다.

사슴의 역할은 물론 종교적이다. 민병훈 감독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당과 신부님, 희생의 모습들에서 느꼈던 직접적인 종교색채보다 사슴의 역할이 훨씬 깊은 인상을 준다. 죄의식의 발로이며 구원의 상징이다. 

올해 국민드라마로 각광받았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유준상은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중산층의 이기적인 도덕심을 위태롭게 연기한 김지영의 연기는 감탄할 정도이다.

김기덕 감독 영화처럼 민병훈 감독의 작품도 같은 작품을 두 번 보기는 심적 피로감이 대단하다. 하지만 민병훈 감독의 ‘터치’는 그런 절망 끝에서 따듯한 인간의 정, 가족의 사랑을 만나볼 수 있다. 어쩌면 신의 품안에 터치할 수도.

여주인공의 극중 이름에 얽힌 슬픈(?) 이야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민병훈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GV) 시간에 끝까지 자리를 지킨 영화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이 영화는 수원시의 협조를 받아 찍으려고 했단다. 그래서 김지영의 극중 이름을 일부러 ‘수원’으로 지었다. 그런데 결국 협조를 얻어낸 것은 인천시였단다. 영화는 어둡다. 사회복지혜택 대상에서 제외된 채 달동네 낡은 집 비좁고 더러운 방에서 욕창과 지병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한 여인네를 도와달라고 애원할 때 그 동사무소 직원이 보이는 어이없는 반응이나 요양병원의 요지경 등 부정적 내용을 봤을 때 ‘인천시’로부터 이런 시나리오에 협조 오케이를 이끌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민병훈 감독이 ‘터치’를 완성하여 극장에 내걸었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만나보기 어렵다. 감독은 또 한 번 좌절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민병훈 감독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아마 민병훈 감독의 다음 작품이 극장에 내걸릴 때에는 우리나라의 극장시스템, 배급방식이 좀 더 ‘인간적으로’ 바뀌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박재환 20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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