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유치한 하이틴 로맨스인줄 알았는데 손에 쥐는 순간 한달음에 읽어버리게 되는 유쾌함과 코끝 찡한 감동이 있었다. (여기서 감동이라함은 극적 구성이 뛰어나다는 말임)
여자, 성균관에 들어가다. 조선시대에 말이다
조선시대, 정확히는 정조시대.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제각기 무슨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당파싸움으로 조선양반들을 ‘오늘날의 여야만큼 극명하게 쪼개놓았던 그 시절’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산 묵동의 한 가난한 양반집. 과거에라도 급제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할 김윤식 도령은 태어날 때부터 병치레로 골골거리는 신세.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한 살 많은 누나 김윤희는 먹고 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채 남자 행세를 한다. 김윤희가 가진 재주라고는 동생 어깨너머로 배운 글 솜씨. 그는 <음란서생> 등의 영화에서 곧잘 등장하는 필사꾼이 된다. 책 한 권을 열심히 필사하여 수고비로 몇 푼 받아 동생 약값에, 가족들 쌀이라도 한 줌 산다. 그러다가 과거치는 사람 대리 시험도 치르게 된다. 이 낭자, 갈수록 간이 커진다. 뛰어난 문재(文才)로 소과 초시를 통과하고 생원시에 덜컥 합격한다. 그리고는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까지 준다기에 좋다고 들어갔다만 3인 1실의 ‘스파르타식 합숙원’일 줄이야. 김윤희 낭자는 노론집안의 꽃미남 이선준과 소론 집안의 터프가이 문재신과 한방에 기거하게 된다. 아무리 남장을 해도 그 곱상함을 결코 감출 수 없는 (김윤식의 호패를 찬) 김윤희 낭자. 아, 어찌될까. 정조 임금은 성균관에서 학문정진에 여념이 없는 이들이 마냥 귀엽고, 기특하여 가끔 찾아온다. 김윤희 낭자 언제까지,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고, 자기의 속마음을 속이며 이선준 도령과 한방에서 공부만 할 수 있으리오. 문재신은 또 어떻고....
옛날 옛적 조선시대에..
인터넷에서 성균관을 찾아보았다.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출발하여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공자왈맹자왈 개념의 ‘유교 및 전통문화’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근대적 개념의 교육의 역할은 성균관대학교가 수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 수는 200명이 정원이었단다. 과거에 합격하여 들어온 사람, 아버지 빽으로 들어온 사람해서 모두 200명이었다. 물론 전부 남학생들이다. 오늘날 성균관대학교 학부생은 9,059여 명이고 그중 여학생은 4,149명이란다. (음.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나온 수치. 2009년 기준이고, 정원 내 재학생 수치임) 여학생들 굉장히 많다. 이거이거.. “남자는 하늘이다" 남하당의 박영진 대표가 들었으면 기겁할 내용이다. ”어디 감히 여자가 대학에?“ 기가차고 코가 찰 노릇이다. 여하튼 그 시절에 남자들 무리에 여자가 하나 몰래 끼어들었으니. 어찌 아무 일도 없으리오. 흥미로운 사건사고가 분명히 펼쳐질 것이다. 안 펼쳐지면 그게 비정상인 것이지.
잘 짜인 이야기
소설을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은 이야기구조가 너무나 잘 짜였다는 사실이다. 전체적 배경은 ‘당쟁’이다.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는 그 무서운 사색당파싸움말이다. 아무리 기발한 작가라도 당쟁을 배경으로 로맨스를 이끌어낼 줄이야. 확실히 이인하의 <영원한 제국>이 비극버전이라면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코믹 버전이다. 서로 원수지간인 가문의 자제가 성균관에 모였고, (어렴풋이 나타나지만) 등장인물(부모세대)의 ‘이른바’ 연애라인이 심상찮다. <로미오 줄리엣> 스타일이지만 한 세대의 비극을 이겨내는 발칙함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정조의 개혁마인드를 뒷받침할 성균관의 신진 활력소가 요소요소에서 꿈틀거린다. 적어도 역사적으로 너무나 묵직했던 당파싸움과 정조의 정치역량은 이 소설에서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수준에서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어진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이야깃거리는 단연 ‘남자가 된 여자’이야기다. 영화에서 많이 보아왔다. 남자가 살기 위해 여자가 되어야하는 운명은 코미디 <뜨거운 것이 좋아>(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9년 작)에서 충분히 웃긴다. 공부하고 싶어서 안달인 여자 이야기는 쇼 브라더스의 <양산백과 축영대>(양축)도 있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옌틀>이란 작품도 있다. 이렇게 동과 서, 고와 금에 거듭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 기발한 부조리 상황극 때문일 것이다. 김윤희 낭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진 재주로는 유일한’ 글 실력으로 성균관까지 가게된 것이다. 그러나 성균관에서부터는 너무나 곱상하기에 갖은 풍파를 다 겪어야하는 것이다. 일단은 여자로 오해받거나, 나아가서는 ‘남자지만 끌린다’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아슬아슬하게 걷게 되는 것이다. 바라만 봐도 가슴이 콩콩거리는 잘 생긴 남자를 마냥 쳐다만 봐야하는 김윤희 낭자의 가슴앓이보다는, “아이고, 왜 저렇게 기막히게 예쁜 ‘남자’에게 내 마음이 끌릴까.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 손목이라도 잡고, 도둑키스라고 하고 싶은 ‘근엄한’ 이선준 도령의 심리상태가 더 안쓰럽다. 그리고 이들 주인공을 백배 흥분시키고, 마음 졸이게 하는 조연 문재신과 구용하도 탁월한 조연 캐릭터이다. 소설에서 가장 웃겼던 대사는 문재신이 분위기 잔뜩 잡고 겁주는 대사 “난, 알록달록한 게 싫다!”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사랑의 세레나데가 어디 있을꼬.
이건 드라마로 끝날 일이 아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대박일 소재이다. 게다가 성균관을 나와 규장각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모험은 ‘해리 포터’를 능가할 시리즈의 가능성, 아니 이야기가 있다. 물론, 스핀 오프 시리즈도 양산될 것 같다. <비명을 찾아서>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최고의 가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말야말야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연애질이야. ‘성균관’에서는 KBS와 제작사에서 ‘성균관’의 근엄함에 ‘스캔들’이미지 단 것에 대해 항의했단다.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알고 보면 ‘대물’이나, ‘여림’이나 어린 애들이 하는 대사가 살짝 ‘소프트포르노’ 분위기도 있다. 그게 더 앙증맞게 귀엽다. 드라마 보면서 책도 한 번씩 찾아보시라. 책이 너무 재밌어서, 꼭 드라마를 보게 된 케이스이다. (박재환, 2010.8.31)
양산백과 축영대(축영태)는 중화권에서 여러차례 영화/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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