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 사건] 성룡의 이름, 이동승의 집념, 홍콩영화의 미래

2009. 6. 24. 13:55홍콩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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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흥미로운 홍콩영화 한 편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동승(爾冬陞,얼동셩) 감독의 <신주쿠 사건>이다. 신주쿠(新宿)는 일본 수도 도오쿄(東京)의 가장 번화가이다. 초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일본 경제의 심장 같은 곳이다. 실제 이곳의 경제규모는 아시아 웬만한 국가 규모를 뛰어넘는다. 신주쿠의 가부키초(歌舞伎町)와 오쿠보(大久保)가 주 배경이다.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 멕시코 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미국 국경을 넘듯이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 해안으로 몰려온다. 이들이 타고 오는 배는 낡아빠진 화물선이고 그 배 밑바닥이나 컨테이너 속에서 질식해서 죽는 일도 왕왕 있다. 영화에서 성룡(鐵頭)은 중국 동북부 흑룡강(헤이룽쟝) 지방의 트랙터 수리공이었다. 여자 친구 슈슈(秀秀)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후 연락이 끊기자 이 밀항 대열에 합류한다. 그는 밀항선을 탈 때 공안을 죽였기에 이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 된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일본 해안가에 도달한 것이다.



   밀항선은 일본 해안에서 암초에 좌초당한다. 겨우 목숨을 건진 수백 명의 밀항자(밀입국자)가 일본 사방천지로 흩어진다. 성룡은 겨우겨우 신주쿠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그곳에서 동포에 의해 겨우 거처를 마련하고 막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재팬 드림’을 안고 일본에 밀입국한 중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하수구 청소 아니면 쓰레기 처리장에서의 허드렛일이다. 경찰 단속이라도 뜨면 도망가기에 바쁘다. 연락이 끊겼던 슈슈는 그동안 일본 야쿠자 '넘버 투' 에구치(가토 마사야)의 아내가 되어 있다. 일본 야쿠자(三和會)는 새로이 보스(오야붕)를 뽑았지만 조직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 오야가 되기 위한 2인자들의 칼부림과 배신전이 펼쳐진다. 성룡은 옛 애인을 위해, 모국을 떠난 동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암울한 운명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키기 위해 에구치와 위험한 거래를 하고 청부살인에 나선다. 그 결과 그는 신주쿠의 새로운 중국인 조직의 보스가 되지만 칼부림은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홍콩의 이동승이 감독을 맡았다. 이동승 감독은 쇼 브러더스 시절 액션 영화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영화감독으로 변신하여 괜찮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장국영과 서기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색정남녀>에서는 포르노업계를 빗대어 홍콩영화계의 막장현실을 그려내었다. <망불료>(忘不了)에서는 여주인공 장백지를 통해 홍콩 멜로물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그리고 <몽콕의 하룻밤>(旺角黑夜)에서는 홍콩으로 건너온 중국 킬러(오언조)의 궤적을 통해 명품 조폭드라마를 완성했다. 이동승 감독은 10년 쯤 전에 한 잡지에서 신주쿠에서 벌어진 중국인 칼부림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이동승은 그 뒤 신주쿠의 중국인 범죄단체에 대한 취재를 했고 이 영화를 준비한 것이다. 이동승 감독이 보기엔 신주쿠는 아시아 자본주의, 욕망, 권력의 중심부이고, 이곳의 중국인 조직은 모든 중국인의 야망과 절망이 펄펄 끓어오르는 용광로였다.

   이동승 감독과 성룡은 오래 전에 중국인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는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해 의기투합했다. 성룡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영화인생에 큰 획을 긋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코믹 액션, 몽키 쿵푸가 아닌 정극 드라마에의 도전이었다. 물론 그는 <(뉴) 폴리스 스토리>나 <중안조> 같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진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성룡은 이 작품을 통해 확실히 자신의 연기 생애에 큰 이정표를 세운다.

 이 영화 아주 잔인하다

   <신주쿠 사건>은 일본 조폭과 중국 조폭이 날카롭게 맞부딪친다. 일본에 밀입국하여 쥐죽은 듯 지내던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조폭간의 세력 전에 끼어들게 되고 희생당하게 된다. 성룡보다 먼저 신주쿠에 건너와 자리 잡은 소심한 중국청년 아걸(오언조)은 조폭 전쟁의 첫 번 째 희생자가 된다. 그는 잔인하게 한 쪽 손목이 잘리고 얼굴엔 깊은 칼자국이 남는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는 중국에서 상영 불허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야쿠자 이야기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영화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를 보면 신주쿠의 한국계 야쿠자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이동승 감독은 익히 보아온 일본식 야쿠자의 잔혹화면이나 한국식 야쿠자의 무국적성 방황과는 달리 중화주의적 시선을 드러낸다. 물론 거창한 대국주의는 아니다. 밀입국한 중국인들이 일본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거리며 목숨을 내놓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 야쿠자는 이미 국제화되었다. 야쿠자 조직에는 한국계, 베트남계, 중국계가 스며들었다. 중국계도 이미 복건성 출신, 광동출신에 대만파까지 다양한 분기현상을 보여준다. 오언조의 손목을 잘라버리는 냉혹한 술집 주인은 신주쿠의 대만계 조폭이다. 일본 야쿠자들은 ‘나와바리’와 출신을 적절히 경쟁시키고, 도태(처단)시켜서 조직을 유지하고 확장시켜나간다. 그리고 덤으로 일본 정계 거물과의 검은 커넥션도 보여준다.

 감독의 냉혹한 시선이 담보된 연출은 시종 관객을 짓누른다. 배우들의 열연도 이 영화의 무게감을 더한다. (불과 몇 초의 단순한) 베드신이지만 성룡의 연기변신도 화제이다. ‘미소년’ 이미지로 영화계에 데뷔한 오언조의 연기는 <베트맨 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를 연상시킨다. 진패, 전가락, 노혜광과 함께 두기봉 패밀리인 임설의 연기도 안정감을 준다. 원래 홍콩과 중국의 합작영화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명목상 주연급 배우의 1/3이상은 중국(대륙)출신의 배우를 캐스팅해야한다. 이 규정 때문인지 서정뢰(시징레이)와 범빙빙(판빙빙)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한다. 하지만 야쿠자 영화에서의 많은 여배우들의 운명처럼 남자 캐릭터의 명운을 갈라놓을 공감가는 연기를 펼치지는 않는다. 형사반장으로 출연하는 일본배우 타케나카 나오토의 연기는 물론이고, 야쿠자로 출연한 일본 배우들은 실제 야쿠자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열연이다.

  이 영화와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홍콩영화계는 오랜 르네상스를 거친 뒤 10년 쯤 전부터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영화가 중국과의 합작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히트작들은 중국 물주(物主)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중국에서 상영될 수 있는 조건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중국의 심의제도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영화 말이다. 이동승 감독의 이 영화 <신주쿠사건>은 만들어질 때부터 화제가 되었지만 후반작업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걱정스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중국의 현행 심의제도를 통과하기에는 너무 수위가 높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등급제가 없기에 가장 보편적인 시선에서 편집되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신주쿠 사건>은 야쿠자를 다룬 영화이니 과다폭력, 유혈낭자 등의 이유로 중국내 상영이 힘들 것이다.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라는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경우 대부분 홍콩판 따로, 중국판 따로 편집한다. 중국판에서는 악당이 죽거나, 공안에 잡혀가는 걸로 끝난다. 이동승 감독은 이런 수정/삭제/편집에의 유혹을 거부했다. 자신의 영화가 한번 잘리면 앞으로 중국에서 만들 영화가 모두 그런 제한을 당해야한다는 자존심의 문제였던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과 홍콩의 박스오피스 규모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중국의 영화시장 자체가 홍콩보다 훨씬 커져버린 것이다. 몰락해버린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으로 달려가는 현실에서 이동승 감독은 어려운 결정을 한 셈이다. 실제 이 영화가 중국에서 상영허가가 나지 않은 것은 오언조의 손목이 댕강 잘려나가는 화면의 잔인함보다는 외국에서 펼쳐지는 중국인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란다. 중국은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자국의 이미지가 영화를 통해 외국에서 왜곡, 폄하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또 하나 이 영화가 홍콩과 대만에서 개봉될 즈음에 성룡이 설화를 일으킨 것이다. 성룡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홍콩 연예인, 아니 거의 모든 홍콩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중국인이란 사실을 이미 ‘기쁘게’ 받아들인 상태이다.  성룡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대(大)중화인이란 사실에 감동받았고, 그걸 만방에 알리는데 최일선에 서있는 연예인이다. 이 영화가 홍콩과 대만에서 상영될 때 성룡은 보아오 포럼에 참석하였다. 성룡은 여기서 “중국인은 관리가 필요하다 대만은 자유가 너무 많아 혼란스럽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런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 때문에 대만과 홍콩의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발끈했다. 성룡의 돌발 발언에 대해서는 성룡의 절친한 동료 친구들도 어떻게 변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 괜찮게 해석한 사람은 “성룡이 좀 못 배워서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마구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처럼 자기 생각을 맘껏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홍콩자유와 민주의 상징 아닌가.”라는 것. 여하튼 성룡의 발언 이후 이 영화는 대만과 홍콩에서도 흥행이 물 건너가 버렸다.

  설화를 일으킬 정도로 중국 국가 홍보에 나서는 성룡이 어렵게 찍은 영화가 정작 중국에서는 국가이미지를 실추시킨다고 상영이 거부당한다니 아이러니이다.

   이동승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는 방법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힘을 합쳐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중국과 일본, 홍콩에서 힘을 모아 찍은 것이다. 후반작업은 태국에서 진행되었다. 이동승 감독은 이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중국내 상영좌절과는 관계없이 또 다른 범아시아영화를 찍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 대단한 영화와 대단한 영화인들 아닌가.  (박재환 200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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