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의 제작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과도하게 홍보하지만 않았더라면 영화 ‘해무’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해무’는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너는 ‘보트피플’의 드라마, 혹은 공산사회에서 막 자본주의의 맛을 깨닫기 시작한 연변조선족들의 ‘코리안 드림’을 다룬 위대한 사회드라마로 인식될 뻔한 작품이다. 2001년 한국에 밀입국하려는 중국인들이 바로 그 배에서 처참하게 죽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 영화는 실제사건을 얼마나 충실하게, 아니면 얼마나 더 보탰는지 모르겠다. 그 최종결과물은 어정쩡한 호러에 공감이 덜 가는 순정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김 선장의 위험한 선택
여수에서 20년 넘게 안강망어선 전진호로 고기잡이를 해온 철주 선장(김윤석)은 요즘 죽을 맛이다. 고기는 안 잡히고, 몇 있는 선원에겐 월급도 줘야하고, 예고 없이 집에 들어가니 여편네는 딴 놈이랑 놀아나고 있으니 말이다. 총체적 딜레마. 관에서는 어선감축이니 하며 염장을 지른다. 결국 검은 유혹을 받게 된다. 짝퉁 롤렉스 손목시계를 하나 얻어차고 거금이 약속된 위험한 거래에 나선다. 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중국에서 건너온 배에서 뭔가를 넘겨받으면 되는 것이다. 밀수가 아니라 사람을 건네받는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중국인을 넘겨받을 때까지는 그래도 위험부담은 있었지만 괜찮은 비즈니스인 듯 했다. 그런데 짙은 안개-해무-가 뱃전을 덮고 어업지도선이 다가오자 서둘러 이들을 배 밑바닥 어창에 밀어 넣고부터는 ‘해무’는 무서운 영화로 돌변한다. 고깃배는 밀입국배가 되고, 그 배는 이제 살인과 인간 도륙의 지옥선이 되는 것이다.
사두(蛇頭), 밀입국, 그리고 제7태창호
여러 이유로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 먼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계로 스며든다는 것은 인류역사에선 흔한 일이다. 메이플라워를 탄 청교도들도 그랬고, 월남이 패망한 뒤 일엽편주에 목숨을 건 보트피플도 그랬고. 최근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해안 쪽으로 수만 명이 넘어온다고 그런다. 물론 배가 가라앉아 고깃밥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단다. 중국도 그러하다. 중국에서는 이런 밀입국 브로커를 셔토우(蛇頭,사두)라고 부른다. 마약밀매만큼이나 조직화된 범죄이다. 1990년대엔 홍콩과 일본으로 밀항선을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노선에 한국이 포함되기도 했다. 2001년에 발생한 태창호 사건이 그러하다. 중국 절강성에서 출발한 60명의 중국인은 태창호에 실려졌고, 어업지도선이 다가오자 배 밑바닥 창고에 사람을 집어넣었고 25명이 질식사한 실제사건이다. 죽은 사람은 바다로 내던져 버려졌고,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한국 땅에서 다 체포되어 추방당했단다. 선장과 선원은 징역을 살았고 말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 2007년 극단 ‘연우무대’가 창립30주년 작품으로 ‘해무’로 처음 무대에 올렸다. 그 후 몇 차례 공연은 이어졌다. 연극 ‘해무’를 본 심성보 감독이 감동을 받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매력적이었을까. ‘코리안드림’을 안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오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더 나쁜 경우’를 막기 위해 ‘더 나쁜 대처’를 하게 되고, 또 다시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그런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실제 인간은 ‘나쁜 순간’에 내던져졌을 때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최악의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해무’는 바로 그런 최악의 인성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선장은 자신의 배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아집과 독선은 끝내 광기에 휩쓸리게 된다. 선원들도 각자의 욕구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상황을 수습하려다 파리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최악의 지점으로 빨려들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넋 놓고 영화줄거리를 쫓아가다 어느 순간부터는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동식은 왜 홍매에 빠지나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은 한국의 뱃사람과 중국의 조선족이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국교를 수교하고 그 전후로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동북삼성으로 사업차, 관광차 몰려갔다. 그리곤, 오랜 동족을 만난 한국인들은 철딱서니 없이 돈 자랑을 해대는 일이 많았다. 그리곤 연변조선족 사회에선 한국에 대한 묘한 동경과 전설이 생겼다. ‘딱 1년만 뼈 빠지게 일하면 중국에서 평생 일해도 못 벌 큰 돈을 쥘 수 있다’고. 실제 그랬다. 식당에서 먹고 자고,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큰돈이 된다. 그렇게 한국에 많은 중국인(조선족)이 들어왔다. 다양한 방법으로. 물론, 제7태창호의 경우처럼.
홍매(한예리)는 한국에 먼저 들어간 오빠를 찾아 그 밀입국선에 몸을 실은 것이다. 동식(박유천)은 적어도 여자문제에 있어선 순수한/순진한 한국인이었고 홍매는 ‘순수의 은둔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여정에 오른 ‘순진무구한’ 여자였다. 홍매가 큰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지는 알 수 없고, 큰돈을 벌어 돌아갔는지 모른다.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끔찍한 일들은 동공에 아로새긴 채 남은 삶을 한국에서 순수하게 살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뱃사람들은 돈 때문에, 육욕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순수함 때문에 목숨을 희롱했고, 밀입국자들은 돈 때문에, 목숨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희롱했다. 순수의 시대, 동정의 뱃사람들은 그렇게 서해 앞바다에서 가라 앉아버렸다.
동식은 해물라면을 먹으면 눈물을 흘릴 것이다. 매워서가 아니라! (박재환, 20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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