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 2002/10/26)왕가위 <아비정전>의 영어제목은 ‘Days of Being Wild’이다. 조금 시적으로 옮기자면 ‘뒷골목의 날들’정도가 어울릴 것 같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는 ‘욕망의 날개’(欲望の翼)로 소개되었다. 왕가위 영화에 대해서만은 우리나라 영화팬은 왕가위의 작명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아비정전>제목만으로는 이 영화가 어떠한 영화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중국문학을 배운 사람이거나 루쉰(노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아큐정전>과 관련지어 영화를 감상할지도 모른다. <아비정전>은 확실히 문학적인 영화이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만큼 방황하는 젊음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왕가위 영화답게, 결코 거시적이거나 연대기적이지는 않다. 왕가위는 시간단위, 그것도 ‘분’ 단위에서 멈춰 선 한순간의 격정과 미세한 떨림만을 포착하고 그 여진을 어둠 속에 매어둔다.
영화는 1961년을 전후한 홍콩을 보여준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영국의 보호 속에 겨우 자유민주국가로 살아남은 홍콩. 중국에서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넘어오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좁은 땅덩어리에선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생업에 매달려야만 했던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처럼 높은 마천루가 자본주의의 번영을 보여주기 전의 ‘그 시대’ 홍콩 뒷골목의 젊은이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들에게서 국가관념, 이데올로기 개념, 긍정적 로맨스는 보이지 않는다. 유한마담을 등쳐먹는 제비족이나 댄서의 기둥서방 같은 어두운 홍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장국영은 체육관 매표소 아가씨 장만옥을 화려하고도 달콤한 말솜씨로 녹여버린다. 불안한 동거는 내일이라곤 전혀 없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변덕스러운 장국영에 의해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그 빈자리에는 댄서의 순정을 가진 유가령이 들어온다. 여자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파트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장국영, 로맨스를 만들고 싶은 유가령, 그리고 그 유가령을 짝사랑하는 장학우가 안타까운 연정을 내비친다. 그렇게 버림받은 장만옥에게 유덕화가 다가온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순찰하는 홍콩경찰 유덕화. 유덕화는 버림받은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장만옥을 불쌍히 여긴다. 장국영은 생모를 찾아 홍콩을 떠나 필리핀으로 향한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유덕화는 선원이 되어 홍콩을 떠났고, 장국영과 필리핀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 어긋난 인연의 인물을 공유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대책 없는 장국영은 생모에게서 버림받고 필리핀에서 최후를 맞는다. 유덕화는 잘못된 인연에 휘말리면서 같은 신세가 된다. 냉정을 유지하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는 이번엔 또 다른 홍콩의 방황하는 젊음을 보여준다. 양조위가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하며 외출을 준비한다. 관객은 양조위와 유가령, 장만옥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받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발 없는 새’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발이 없어 하늘을 날기만 하던 새가 지상에 안착하는 것은 마지막 생의 순간이라고.
영화에서 장국영은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사람이고 그의 생모는 이국 땅에 있으며, 양모는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장만옥은 홍콩과 마카오를 오가며 살아가고, 유덕화는 선원을 동경하며 홍콩을 떠나갈 생각뿐이다. 홍콩에 남아있는, 그리고 남아있을 유가령과 장학우는 원인모를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아비정전>에 포함된 등장인물의 불안감이다. 장국영의 방황은 생모에 대한 표현하기 힘든 애증의 결과이다. 당시 홍콩의 우울한 상황을 배제시키더라도 청춘의 방황과 그 극복 방식, 해결점에는 공통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인식과 수용이라는 여유를 애써 외면하게 되고 절박감과 조급한 충동만이 가득한 것이다. 그렇게 장국영은 자신을 내버렸고 유덕화는 희생당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살아남은 유가령과 장만옥은 침울한 홍콩의 삶을 연명해가는 것이다.
왕가위의 <아비정전>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전설을 남겼다. 그리고 많은 왕가위 팬들은 <아비정전2>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왕가위가 <아비정전>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이 중요할까. 홍콩은 그렇게 노쇠해지고 홍콩의 사람들은 그렇게 중국인으로 편입되어버렸는데 말이다.
그렇게 <아비정전>은 볼 때마다 우울해진다. (박재환 200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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