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독재자, 나의 아버지

2014. 11. 3. 11:56한국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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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라는 작품을 내놓았던 이해준 감독의 신작 ‘나의 독재자’가 최근 개봉되었다. ‘나의 독재자’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기발한 준비과정을 했었다는 신문기사에서 모티브를 찾은 영화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시절, 당시 이후락 중앙정부부장이 직접 평양를 다녀와서는 중대발표를 했었다. “청산가리를 품고 죽을 각오로 북한에 다녀왔다. 곧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이후 중정에서는 김일성 대역을 내세워 정상회담을 준비한다. 그의 말투는 기본, 사고방식까지 수령에 가깝도록 연습 또 연습한다. 물론, 유신과 함께 이 프로젝트는 파기되었다. 그럼, 김일성이 되기 위해 발버둥쳤던 그 대역배우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해준 감독은 평범한, 아니 사실 연극판에선 형편없었던 한 무명배우가 최고의 배역을 맡아 최고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가 허망하게 그 기회를 놓친 뒤 반쯤은 미쳐버린 리어왕처럼 살아가는 후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면서 영화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같은 감성적 정치영화나 남산의 중정지하에서 펼쳐지는 고문같은 정치풍자극이 아니라 아들에게만은 최고가 되고 싶어했던 평범한 아버지의 좌절된 꿈과, 그런 아버지 때문에 역시 좌절된 삶을 살아야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사실,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전쟁 종전이후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에 있어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평화전략으로 인식되고 있다. 박정희시절에도 영화에서처럼 ‘정상회담’에 대한 생각은 있었으리라. 그리고 전두환 이후에도 모든 대통령들이 정상회담을 고리로 한반도평화체제 정착에 강한 미련/집착을 보였었다. 핵문제가 전쟁발발위기로까지 번지던 YS시절,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급작스레 방북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처음으로 가시화된다. 회담을 보름정도 남겨두고 대화 상대였던 김일성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 기대는 무산된다. 영화에서는 중앙정보부의 활약과 김일성의 급사를 적절히 시나리오에 담는다. 중정(안기부)시절의 무명배우는 기록필름으로 김일성의 제스처 어투를 따라하고, 북한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꼼꼼히 보며 북한식 사고방식을 체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원전을 통해 김일성사상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우위의 사고방식을 체화시킨다. 회담이 좌절되고 나서는 원래 연극인의 꿈과, 아들을 향한 마지막 애비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자신의 방에 갇힌 폐인이 되는 것이다. 그의 방 한쪽 벽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기가 떡하니 걸려있고 말이다.

 

스티븐 킹의 ‘미저리’에서 자신의 우상에게 심각하게 경도된 팬의 광기를 보았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캐스팅될 뻔한 최고의 작품의 주인공 자리에 내쫓긴 배우가 그 배역에 완전히 빠져버린 광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해준 감독의 ‘나의 독재자’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백주대낮에 광화문광장에서 의심스런 복장을 하고 자본주의에 물든 남조선 ’종간나새끼‘들의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현지지도하는 수령의 몸짓은 국가보안법에 맞서는 민주투사나 간첩이라기보다는 미친놈일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인민배우 김성근 역의 설경구는 김일성의 재림에 연기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무명연극인이 오랜만에 맡은 일생일대의 대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쉬움에, 그래서 더욱더 아들 볼 낯이 없는 ‘딱 그 시절의 아버지의 회한’을 극적으로 연기한다.

 

이른바 산업화 시대의 폭군 같은 가부장 아래 민주적 사고의 결핍으로 자란 아들세대는 박해일처럼 전락하여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것이다. 영화적 논리로 보자면 ‘김정은’을 잉태한 셈인 여배우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주변인에 머물고 말 평범한 역할이지만 매번 가장 중요한 인생의 결정은 저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치운다. 남북 간의 블랙코미디일 것이라 생각한 영화가 의외로 부성애와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물론, 그 와중에 무명배우가 가졌을 법한 ‘거위의 꿈’도 들려준 셈이다.

 

영화 후반부 청와대에서 이뤄지는 마지막 리허설에서 대역배우 김일성의 돌직구연기에 대해 참석자 중 하나가 “미친 놈~”이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너무 즉자적인 반응이었다. 대통령이 박수라도 보내며 흠칫 놀라는 표정이라도 보였으면, 지난 30년의 허무한 세월에 대한 멋진 영화적 완성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게 개인적으로 아쉽다.

 

참, 국가정상의 대역배우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에서도 대역이 나오고, 이라크의 후세인이 무너지고 나서도 그의 대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한동안 외신을 장식했었다. 최근 원로문화계인사가 밝힌 스토리도 흥미롭다. 1974년, 당시 미국 포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만찬과 함께 특별공연을 펼쳤단다. 그런데 그 때 정말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발생했단다. 정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바로 불이 들어왔는데 극장장은 놀라운 상황을 목격했단다. 바로 자기 눈앞에 있던 미국 대통령이 사라졌고 대신 그와 꼭 닮은 대역이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미국 백악관의 경호수준을 짐작케 하는 정말 드문 경험담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도 언젠가는 영화화 되겠지.

 

나의 독재자 (15세 관람가/ 2014.10.30.개봉)
감독: 이해준
출연: 설경구 박해일 윤제문 이병준 류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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