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아날로그 시대의 로맨스

2012. 8. 26. 14:44대만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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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국교가 정상화된 지, 그러니까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20년 전 1992년 8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하나 있었다. 대만과 국교를 단절해야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고수했고 그 정책을 받아들이는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당연히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을 국가로 승인했다. 일본(72), 미국(79)과 비교하자면 한참 뒤늦게 한국은 ‘정치적인 이유와 역사적인 명분’으로 끝까지 형제의 연을 맺어온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것이다. 오늘날 대만이란 나라와 정식 국교를 수립한 나라는 10개가 채 안 된다. 대부분 경제적인 지원을 명분으로 ‘명목상’ 외교관계를 갖고 있다. 대만은 그렇게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격적으로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할 때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는 농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대만관객으로부터 물병 세례를 맞고 쫓기던 체육관을 빠져나와야했다. 이해 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가끔 대만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과 배신감을 토로하곤 한다. 여전히 이해 가능한 반응이다. 딱 그 정도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초중반의 대만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대만영화가 한 편 개봉 되었다. 물론 한국과의 외교문제나, 오늘날과 같은 한류스타 이야기는 없다. (소녀시대 대신 그 시절 유행했던 홍콩 장학우의 ‘원비에’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절 우리와 똑같이 ‘공산국가와의 대치’라는 이데올로기 유산을 물려받았고 개발독재시절에 경제에 올 인할 수밖에 없었던 대만사회의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시절 대만의 피 끓는 고등학생들은 어떻게 연애했고, 어떻게 진학고민을 했으며, 어떻게 대만사회가 지탱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 ‘재밌다.’

 

남고생, 여고생을 짝사랑하다. 겉으로는 쿨하지만...

 

 

 

배경은 민국 83년(民國; 손문이 국민혁명을 성공한 1911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서기로는 1994년이다. 지금도 대만은 민국 연호를 애용한다). 대만 중서부의 창화현(彰化縣)의 한 고등학교가 배경이다. 이 영화의 감독 구파도(九把刀)의 모교인 정성중학(精誠中學)이다. 고3 학생 주인공 커징텅은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러 놀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청소년이다.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이란 ‘딱’ 그 수준이다. 항상 여자생각으로 신체의 일부가 ‘발기된’ 놈도 있고, 생겨먹기는 머저리 같지만 자기 자신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놈도 있고, 재미없는 농담으로 여자를 꾀려고 무든 애쓰는 놈도 있다. 그리고 한 놈 정도는 뚱뚱한 놈도 있다. 이들은 학교수업시간에 공통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같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이들 학급에 모범생 진연희를 공통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시절이다. 하지만 어떤 놈은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어떤 놈은 기회만 살피고 어떤 놈은 아닌 척한다. 그 시절엔 그렇게 여학생을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자에겐 전혀 관심이 없던 것으로 알았던 가진동이 이 여학생과 어떤 섬씽이 생길 줄이야. 어느 날 우연찮게 ‘영웅’이 된 가진동은 여학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학에 가게 된다. 이들이 불꽃같은, 정열적인, 끓어오르는 청춘의 한때를 무사히 보내고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유학 가고... 나이 들어 15년 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들은 15년 전을 되돌아보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했는지 좋아했는지를 알게 된다. 친구는 여전히 친구이고, 여자는 여전히 여자이다. 대만시람들은 그렇게 인생을 즐기며 보내는 것이다.

 

대만영화의 매력

 

중국어권 영화도 나름대로의 특징과 매력이 있다. 한 때는 홍콩의 겉멋만 잔뜩 든 액션물이나 도박영화 쿵푸물이 한국의 극장가를 휩쓴 적도 있고, 외화내빈의 전형적 중국 역사물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대만영화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왔다. 불행히도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대만은 먹고살기 바쁘다보니 영화산업에 대해선 우리만큼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다. 그러니 대만극장가엔 항상 홍콩액션물 아니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장악했고 대만영화인의 작품은 우리네 홍상수나 김기덕 류의 예술영화나 실험영화만이 겨우 만들어지고, 외국영화제에 출품되어 “아직 살아있네..”라는 의학적(!) 소견만을 받을 뿐이었다. 그런 형국에  가끔 한국에 소개되는 대만영화는 특별하고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에 최근 소개된 대만영화는 <하이자오 7번지>, <말할 수 없는 비밀>,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등이다. (그 옛날의 <비정성시>나 채명량 감독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고 말이다) 대만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역량을 잘 알고 그런 차원에서 영화를 잘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시절>은 그런 대만의 영화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구파도 감독은 우리가 잘 아는 영화감독은 아니다. 대만에서 영화로만 먹기 살기 어려우니 이런 일 저런 일을 했던 사람이다. 소설도 쓰고 TV일도 하고 연극대본도 쓰고. 능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다는 그래야만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말이다. 감독 이름이 특이하다. 구파도(九把刀). 굳이 번역하자면 ‘아홉 자루의 칼’이다. 본명은 가경등(柯景騰,커징텅)이다. 이 영화에서의 남자주인공 이름이다. 감독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창화 현 출신이고, 정성중학을 나왔고, 주인공처럼 교통대학 관리학과를 졸업했다. 책을 60여 권이나 썼단다.  대부분 무협 류의 판타지 소설이다. 이들 작품은 영화로, TV드라마로, 무대극으로, 그리고 인터넷게임으로 만들어졌단다. <그 시절>은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되었고 그의 감독 데뷔작이 되었다.

이 영화는 작년에 대만을 필두로 아시아 각국에서 개봉되어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대만에서는 4억 1천만 NT$의 수익을 올리며 역대 대만영화 흥행 3위에 기록되었고,  홍콩에서는 놀랍게도 6,186만 홍콩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리며 주성치의 <쿵푸 허슬> 기록을 10년 만에 깨며 최고흥행 중국어영화가 되었다. 지난 연말 중국에서도 개봉되어 쟁쟁한 영화들 속에서 7천만 위앤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역대 중국개봉 최고 대만영화가 되었다. 이 액수는 대만 내 수익규모와 비슷한 규모이다. 중국에서는 교실에서 손장난(?) 하는 장면과 대만국기 등 몇 장면이 삭제되어 상영되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주 개봉되었지만 대만영화를 기억하거나 챙겨보는 사람이 워낙 한정적이니 폭발적인 수익은 기대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대만판 <건축학개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한 번 기대해 볼만 하다. 하지만 원래 이 영화는 <건축학개론>의 아류작도 아니고 한국을 염두에 둔 기획영화도 아니다. 워낙 스토리에 공감의 여지가 많은 영화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흥행결과를 남겼으면 한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감독 구파도와 남자 주인공 가진동이 한국을 찾았었다. 둘 다 한국의 영화팬에게는 낯선 인물들. 그나마 <청설> 등을 통해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있는 진연희가 함께 오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가진동 역시 감독처럼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느껴질 만큼 화끈하고 문제 학생답게 재미있는 학창시절 모습을 100% 리얼 공감으로 이끌어낸다. 물론 친구들 하나하나가 다 전형적인 ‘그 시절 그런 친구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아마도 1990년대를 뜨겁게(?) 산 사람이라면 ‘건축학개론’만큼이나 이 영화에도 열광할 듯하다. 무엇보다 웃기고, 재미있다.

 

덧붙여

 

극중에서 대만에서 갑작스런 지진이 일어나자 대학생이 된 주인공이 급하게 전화로 안부를 묻는 장면이 있다. 이 지진은 실제 1999년 9월 21일 대만 중부지방에서 일어난 921대지진을 말한다. 당시 리히터 진도 7.3의 대지진이 대만을 휩쓸어 2415명이라는 사망하는 막대한 손실을 끼쳤었다. 대만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은 145명이라는 대규모 구조를 신속하게 보냈고 홍콩은 당시 유덕화, 장국영, 매염방, 장학우, 주성치 등 수많은 정상급 연예인들이 주축이 되어 대규모 공연을 가졌었다.

 

한국은? 한국도 16명의 구조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도 못할 만큼 대만에 대한 관심이나 지지는 최저치였다. 대만은 그렇게 한국인에게서 잊혀져가는 모양이다. 대만 지진 관련 글을 찾다보니 이런 글이 있다. 한번 읽어보시길... 한국인의 대만 사랑이 조금은.. ‘많이’ 느껴진다.  (박재환, 201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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